패션의 역사-계몽주의와 로코코의 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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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자유로운 사상으로의 해방
계몽주의와 프랑스의 영향
신분의 매매와 궁정의 타락
감상주의의 시작과 교양의 열풍

2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반영하는 예술
로코코 양식의 예술
대륙과 영국의 가구공예
자유분방한 정원과 정교한 도자기

3 화려하지만 악취가 가득한 궁정
오물투성이의 거리와 불결한 생활상
사교모임과 무도회
도박광의 시대
오락거리 : 사냥, 오페라, 연극

4 유럽 대륙을 휩쓴 프랑스 패션
여성의 패션
여성들의 헤어스타일과 화장
구두와 액세서리
남성의 패션
반항하는 베르테르와 남성들의 헤어스타일
세계시민시대와 제복
패션 잡지와 마네킹의 등장

본문내용

것은 아닐지라도, 여하튼 귀족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옷치레에 가장 많은 돈을 들였다.
사람들은 집에서는 당연히 수를 놓은 값비싼 의상을 벗어 놓았다. 집에서는 잠옷을 입었는데 이 잠옷은 18세기 남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래서 가족들과 있을 때뿐만 아니라 손님을 맞이할 때에도 잠옷을 입었다. 시민 사회가 점점 더 자아를 가지게 될수록 시민의 네글리제 의상을 궁정의상보다 선호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화려하고 값비싼 프랑스식 궁정의상에 대해 반발이라도 하듯이 영국 시민들의 소박한 의상이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는데(그림 23) 그것은 영국 문학이 대륙에서 거둔 승리의 결과였다.
그래서 비단과 빌로드 대신 소모직물로 만들어 내구성이 있는 편안한 스타일의 상의와 밝은 색 대신 어두운 색으로 만들어 착용할 때 실용적인 상의가 다시 등장했다.
반항하는 베르테르와 남성들의 헤어스타일
잘 차려입은 신사 차림에서 요구하는 섬세한 헤어스타일은 숙녀의 헤어스타일만큼이나 손질하는 데 힘이 들었다. 루이 14세 때 등장한 긴 머리 가발은 그가 죽자 유행에서 멀어졌다. 긴 가발의 컬이 지나치면 옆에서 잘라서 프랑스에서 크라포(Crapaud)라 부르는 주머니에 넣어 뒤로 넘겼다. 머리주머니 헤어스타일은 18세기 남성 패션의 특징이다. 비단이나 고무방수가공을 한 천으로 만든 주머니는 크고 넓은 나비매듭을 목에 매어 묶거나 가볍게 목둘레에 걸치는 리본 끈으로 고정시켰다. 옆머리는 컬을 하여 늘어뜨리거나 단단한 롤에 감아 한 층, 두 층 혹은 그 이상으로 관자놀이 옆에 붙였다(그림 24).
루이 16세 치하에서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도에 넘치게 커다란 부피를 차지했을 때 남성의 헤어스타일에도 20개의 두꺼운 둥근 컬 모양을 머리에 둘러 만들어 놓는 소위 ‘아 라 누벨 아도니스’(a la nouvel Adonis)가 있었다. 이마의 머리카락을 세워 부풀리고 흔들리는 솔 모양으로 하는 것이 오랫동안 유행했다. 여성들도 이 유행을 똑같이 따랐으므로 1740년에서 1760년까지 남녀의 헤어스타일이 비슷했다. 비록 어떤 일정한 스타일의 가발-왜냐하면 남성의 헤어스타일에서는 거의 항상 가발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이 신분의 표시로서 금세 정착되긴 했지만 헤어스타일의 유행은 자주 바뀌었다. 가발은 자신의 머리털로 꾸민 헤어스타일과 똑같이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가발을 썼다는 것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유복한 사람들은 1,500개의 가발을 소장한 브륄 백작 정도는 아니더라도 모두들 가발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가발을 머리에 쓰면 무척 더웠으므로 사람들은 수를 놓은 의상을 집에서 벗어 놓듯이 가발을 못에 걸어 놓고 모자나 두건을 썼다. 군대는 특별한 헤어스타일을 권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편발이었다. 편발은 민간인들에게도 유입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편발한 가발 형태로였다. 그러나 유행이 아무리 변하고 일반인들의 가발과 군인들의 편발형태가 아무리 다양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머리에 파우더를 뿌려야 했다. 세기 말엽까지 상류층에 속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머리에 파우더를 뿌려야 했다. 파우더를 골고루 뿌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귀족들은 이를 위해 별실을 마련하였다. 파우더를 천장에 대고 털어내면 그 가루가 고운 눈처럼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는 동안 미세한 가루가 눈이나 입, 코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당사자는 얼굴을 봉지 속에 숨기고 있었다. 파우더를 뿌리는 것은 상류 계층에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전 세기에 걸쳐 수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는데 살인자나 강도 역을 맡은 배우들만이 콧수염을 달 수 있었다. 잿빛 파우더를 뿌린 신사들도 똑같이 화장을 해야 했다. 화장과 파우더 뿌리기는 사람들의 나이차를 없애버렸다. 가발을 쓰게 되자 남성들은 더 이상 모자를 계속 쓰고 있지 않았다. 18세기 내내 남성들은 대개 모자를 팔 아래에 끼고 다녔다. 더 소박한 의상이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들어오고, 젊은이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는 파우더를 뿌리지 않고 다니기 시작하자 비로소 커다란 둥근 모자, 즉 프랭클린의 퀘이커 모자가 들어왔다. 이 모자는 1786년 파리 사람들을 열광시켰고 실크햇의 시조가 되었다.
몇몇 국가에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직물 및 레이스의 수입을 금지했던 것처럼 특정한 신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행을 따르는 것을 금지했다. 왜냐하면 지배계층은 외관상으로 신분의 차이가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상과 관련해서 내리는 명령은 그 의상을 금지하는 것만큼이나 무력했다. 모든 국가와 신분계급은 프랑스의 유행을 따랐다.
세계시민시대와 제복
세계시민의 시대에 이제 서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서로 다른 계층과 민족을 의상을 통해 구분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18세기에는 제복의 열풍이 몰려왔다.
패션 잡지와 마네킹의 등장
18세기에는 패션 분야에서 이전의 세계가 알지 못한 하나의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패션 잡지의 등장이다. 1672년에서 1723년까지「메르퀴르 갈랑」은 베르사유나 파리에서 어떤 것이 세련된 것이며 사람들이 어떻게 또 무엇으로 즐기는지, 사람들이 무엇을 입었는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림이 별로 실려 있지 않았던 관계로 그 잡지는 순수 패션 잡지의 선구로서만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17세기 후반 이래로 파리에서는 매달 한 번씩 최신 유행에 따라 옷을 입은 마네킹, 예컨대 고급의상을 입은 ‘큰 판도라’와 일상복을 입은 ‘작은 판도라’를 런던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판도라는 다른 지역으로도 보내졌고 판도라의 모습에 따라 독일, 이탈리아에서처럼 러시아에서도 여성들은 모두 파리 여성이 되었다. 파리에서 1778년에서 1787년까지 발행된 「패션 갤러리」는 유행에 관심이 있는 모든 신사숙녀들에게 최신의 유행을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파리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상세하고 충실하게 재현해 보여주었다. 1786년에 출간되기 시작한「사치와 유행 저널」은 최고로 좋은 아이디어로 입증되었다.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엽에 패션 잡지의 수와 출간 횟수가 점점 늘어나자 마침내는 일주일에 한 번 나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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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5.12.13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6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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