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1.노계 가집 책판의 특징과 보존 실태
Ⅱ.2.노계 가집의 간행 과정
Ⅱ.3.노계 가집의 판본과 고사본의 차이
Ⅲ.결론
Ⅱ.1.노계 가집 책판의 특징과 보존 실태
Ⅱ.2.노계 가집의 간행 과정
Ⅱ.3.노계 가집의 판본과 고사본의 차이
Ⅲ.결론
본문내용
영향도 짙다. 그리고 이백의 시 <장진주>,<월하독작 其二> <양상가(襄陽歌)>와 이하의 <장진주> 등 고인의 시문을 用事한 흠이 없지 않지만 노계의 <권주가>는 송강의 <장진주사>에 그리 뒤지지 않는 가작으로 평가된다.
『노계집』의 저자인 노계는 <행장>에서도 이야기되어 있듯이 노래에 뛰어났던 당대의 선가자(주로 풍류현장이나 연행현장에서 분위기를 돋우거나 흥을 자아내는 역할이 주된 소임이었다)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개인적 의견이나 고민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힘든다. 다만 대상 인물의 입장에서 그 인물의 생각과 입장을 작품에 반영하거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원론적이고 보편적인 이념을 작품에 담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노계가 지은 명작 대작의 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현실긍정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노계 작품의 대부분이 연구자들로부터 전고와 유사어구를 많이 사용하여 참신성이 떨어지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성향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사곡과 권주가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명작이고 대작인 점에서는 <상사곡>과 <권주가>는 다른 작품들 (누항사나 사제곡)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그러므로 굳이 노계에게 누가 될 이유가 없고 내용 또한 상열지사나 퇴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굳이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빼버렸다기보다는 1831년 노계집을 만들 때에 이미 두 작품이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3.조홍시가 문제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조홍시가>의 제작 동기를 보면 ①『경오본』과 ②『진본 청구영언』에는 한음이 반중조홍을 보고 노계에게 3장을 짓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③『갑진본』에는 한음이 노계에게 조홍을 보내었고 노계가 조홍감으로 느낀 바가 있어 4수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④『손씨수견록』에는 여헌이 노계에게 조홍감을 대접하고 짓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작동기가 ①②는 같고 ③④는 다르다. 그리고 ①②③은 관련된 인물이 한음과 노계이고 ④는 여헌과 노계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盤中早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김석배는 '盤中早紅'이 시조 4수중 첫 수의 그것은 "반중의 조홍감'이지만 ①『경오본』과 ②『진본 청구영언』의 협주의 '盤中早紅'은 시조 첫째 수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김석배는 ④『손씨수견록』을 바탕으로 노계가 이미 시조4수 중 첫 수를 여헌의 명작으로 먼저 지어놓았고 그 이후 한음과 노계가 만났고 한음이 노계의 시조 '반중조홍'을 듣고는 한음이 노계에게 명해서 노계가 다음 시조 3수를 지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갑진본』노계선생문집은 후손들이 4수를 묶어 <조홍시가>라는 명칭을 새로 붙였고 제작동기도 윤색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Ⅲ.결론
송강이나 고산에 비해 노계의 경우는 '연구의 절반이 실증적 작업'이라고 할 정도로 문헌상의 어려움이 많다고 이야기된다. 그런 와중에 이윤문의 발문을 통해서 그 존재만 알려져 있던 판본이 발견되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로 평가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 초기 판본에 대한 그 동안의 추측을 얼마간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미 '고사본'을 통해 제기되어 온 <노계집>의 '윤색'문제에 대한 또 다른 근거를 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석배,「새로 발견된 『노계가집』(『영양역증』)에 대하여」, 한국어문학정례발료자료집,2004
김석배,「박인로의 <조홍시가>연구」,문학과언어 제27집,문학과 언어학회
김석배,「『노계가집』의 <사제곡>과 <누항사>에 대하여」,선주논총제7집, 금오공대 선주문화연구
『노계집』의 저자인 노계는 <행장>에서도 이야기되어 있듯이 노래에 뛰어났던 당대의 선가자(주로 풍류현장이나 연행현장에서 분위기를 돋우거나 흥을 자아내는 역할이 주된 소임이었다)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개인적 의견이나 고민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힘든다. 다만 대상 인물의 입장에서 그 인물의 생각과 입장을 작품에 반영하거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원론적이고 보편적인 이념을 작품에 담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노계가 지은 명작 대작의 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현실긍정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노계 작품의 대부분이 연구자들로부터 전고와 유사어구를 많이 사용하여 참신성이 떨어지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성향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사곡과 권주가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명작이고 대작인 점에서는 <상사곡>과 <권주가>는 다른 작품들 (누항사나 사제곡)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그러므로 굳이 노계에게 누가 될 이유가 없고 내용 또한 상열지사나 퇴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굳이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빼버렸다기보다는 1831년 노계집을 만들 때에 이미 두 작품이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3.조홍시가 문제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조홍시가>의 제작 동기를 보면 ①『경오본』과 ②『진본 청구영언』에는 한음이 반중조홍을 보고 노계에게 3장을 짓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③『갑진본』에는 한음이 노계에게 조홍을 보내었고 노계가 조홍감으로 느낀 바가 있어 4수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④『손씨수견록』에는 여헌이 노계에게 조홍감을 대접하고 짓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작동기가 ①②는 같고 ③④는 다르다. 그리고 ①②③은 관련된 인물이 한음과 노계이고 ④는 여헌과 노계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盤中早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김석배는 '盤中早紅'이 시조 4수중 첫 수의 그것은 "반중의 조홍감'이지만 ①『경오본』과 ②『진본 청구영언』의 협주의 '盤中早紅'은 시조 첫째 수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김석배는 ④『손씨수견록』을 바탕으로 노계가 이미 시조4수 중 첫 수를 여헌의 명작으로 먼저 지어놓았고 그 이후 한음과 노계가 만났고 한음이 노계의 시조 '반중조홍'을 듣고는 한음이 노계에게 명해서 노계가 다음 시조 3수를 지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갑진본』노계선생문집은 후손들이 4수를 묶어 <조홍시가>라는 명칭을 새로 붙였고 제작동기도 윤색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Ⅲ.결론
송강이나 고산에 비해 노계의 경우는 '연구의 절반이 실증적 작업'이라고 할 정도로 문헌상의 어려움이 많다고 이야기된다. 그런 와중에 이윤문의 발문을 통해서 그 존재만 알려져 있던 판본이 발견되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로 평가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 초기 판본에 대한 그 동안의 추측을 얼마간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미 '고사본'을 통해 제기되어 온 <노계집>의 '윤색'문제에 대한 또 다른 근거를 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석배,「새로 발견된 『노계가집』(『영양역증』)에 대하여」, 한국어문학정례발료자료집,2004
김석배,「박인로의 <조홍시가>연구」,문학과언어 제27집,문학과 언어학회
김석배,「『노계가집』의 <사제곡>과 <누항사>에 대하여」,선주논총제7집, 금오공대 선주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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