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미술- 헤브라이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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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 미술- 헤브라이즘의 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기독교 미술의 흐름

1. 초기 기독교 미술

- 초기 기독교 미술의 탄생 배경
- 카타콤 미술
- 카타콤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
- 카타콤의 형태
- 바실리카 양식

2. 비잔틴 미술

- 비잔틴 미술 : 도상의 군원
- 비잔틴 제국의 미술 역사 개관
- 제1기
- 제2기
- 제3기
- 성상파괴운동

본문내용

한 중세 미술을 구축한 이 그리스도교 미술의 본질은 신학이론을 기초로 한 절대적인 신에 대한 찬미에 있다.
▶ 제1기
유스티니아누스대제 때부터 성상파괴운동 종결까지인 이 시대의 대표적 기념 건축물로서는 먼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대성당을 들 수 있다. 바실리카형 교회에 돔을 올리는 그리스도교 건축의 꿈을 실현한 것인데, 이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의 대부분이 9세기 이후의 것이다.
6세기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벽화는 북이탈리아 라벤나의 여러 교회에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 그리스 테살로니카의 여러 교회, 시나이산의 하기아 카타리나수도원 교회의 모자이크, 이집트의 사카라와 바위티의 수도원들의 프레스코 벽화 등이 제국 영토 내의 각지에 현존한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안티카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도 이 시기 비잔틴 양식 회화의 귀중한 작품이다. 비잔틴 회화에서 제2의 중요한 장르인 이콘도 시나이산의 작품처럼 6세기의 것이 있다. 이콘은 비잔틴 미술의 성자숭배에 얽힌 독특한 형식의 종교화로서 그 뒤 화려하게 전개되었다.
▶ 제2기
성상의 표현을 우상 숭배로서 금지하여 100여 년 동안 비잔틴제국을 뒤흔든 성상파괴운동이 종결된 뒤, 앞 시대의 미술을 재흡수하면서 진정한 비잔틴 양식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미술이 확립되었다. 마케도니아왕조(868∼1057)에서 콤네누스왕조(1057∼1185)에 걸친 시대이다.
건축에서는 그리스 십자가형 평면에 돔을 올린 교회당이 9∼10세기에 성립되었다. 비잔틴 교회 미술은 실로 신의 영광찬미에 바쳐진 것이었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교회 및 벽화는 그리스의 다프니 수도원 교회, 호시오스 루카스 수도원 교회, 키오스섬의 네아모니 수도원 교회 등에 보인다.
또 이 시대는 슬라브 제국(諸國)의 그리스도교화(化)에 따라 비잔틴 미술양식이 제국 주변으로 퍼진 시기로 마케도니아·세르비아·불가리아·러시아의 여러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시칠리아 섬에는 지금도 훌륭한 벽화가 있는 교회당들이 남아 있다. 이콘도 성상파괴운동 이후 특히 융성했다. 이 시기의 벽화·이콘·사본 삽화에서도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인 자연주의적 양식과 추상적인 동방 양식 또는 민족적 지방 양식의 융합이라는 비잔틴 회화의 일관된 과제를 볼 수 있다.
▶ 제3기
1204년 이후 57년 동안 계속된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거가 끝나자 비잔틴미술은 팔레올로구스 왕조기(1261∼1453)에 최후의 꽃을 피웠다. 정밀한 기법에 의한 부드럽고 우아한 정신이 감도는 이 시기의 벽화는 실로 중세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일대 종말을 알리는 아름다움을 가진다.
이미 터키인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린 제국은 쇠약해지고, 문화의 중심도 점차 지방으로 분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미술이 마지막까지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기아 소피아대성당과 코라수도원 교회의 모자이크 및 프레스코 벽화가 보여주고 있다.
제1기·제2기의 장중하고 위대한 양식은 모습을 감추고, 조심스러우며 세련된 섬세한 감정 표현이 나타난다. 또 그리스의 미스트라, 소아시아의 트라브존(트레비존드),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여러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지방 양식화된 이 시기의 여러 벽화가 남아 있다. 비잔틴 미술은 제국 멸망과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다. 아토스산을 비롯하여 각지의 수도원이 그리스정교와 함께 그 미술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3) 성상파괴운동(iconoclasm)
성상파괴운동은 성상(icon) 숭배의 시비를 둘러싸고 8-9세기 동로마제국에서 전개된 사회운동이다. 성상 파괴론자들은 구약성경의 십계명(출20:4,5)에서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과, 우상숭배로 전락할 가능성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성상숭배에 반대했다. 성상 숭배론자들은 성상의 상징적인 성격과 피조물의 존엄성을 강조했으며,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네스는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서 성상은 신의 상징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으며 신은 육화(肉化)를 통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지 창조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상(像)을 만드는 것을 지속적으로 반대했는데도 성상을 사용하는 것은 특히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6세기 말-7세기에 성상은 교회가 공식 권장하는 숭배 대상이 되었고, 성상이 생명을 갖고 있다는 미신적인 신앙을 내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들에 대해 특히 소아시아-화상표현(畵像表現)에 대해서 헬레니즘적 관용성을 버린 지역-에서는 반발이 점차 거세졌다. 726년 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공식적으로 성상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고, 730년 성상을 사용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 조치로 성상숭배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 박해는 레오3세의 계승자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때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 레오4세의 사후 섭정을 하던 여황제 이레네가 787년 니케아에서 소집한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성상파괴주의를 단죄하고 성상 사용을 재확립했다. 814년 레오 5세가 즉위한 뒤 다시 권력을 잡은 성상 파괴론자들은 공의회(815)에서 성상 사용을 다시 금지시켰다. 성상 파괴론자들이 권력을 잡은 이 두 번째 기간은 842년 황제 테오필로스가 죽음으로써 끝났다. 843년 그의 미망인인 황후 테오도라는 최종적으로 성상숭배를 회복시켰으며, 동방정교회는 지금도 이 사건을 정교회의 축일로 기념한다.
성상파괴주의는 살아있는 생물이나 종교적인 인물을 성상으로 만들거나 시각적으로 형상화해서 사용하는 것을 종교적인 이유에서 반대하는 주장으로, 시대에 따라 정도는 달랐지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특히 조각 작품이나 유대인의 예술 활동을 제한하는 기능을 했다.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은 아바스 왕조, 대부분의 시아파교도, 투르크 왕국에서는 공공건물에서만 사용하지 못했으나 초기 이슬람 시대, 아프리카의 베르베르 왕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시리아에서는 어디에서도 사용할 수 없었다. 성상파괴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 725-843)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인이나 성직자를 조상(彫像)으로 만드는 일이 금지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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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3.01
  • 저작시기2006.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8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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