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인간이해와 하나님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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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경적 인간이해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격적인 결정 속에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2. 자연적 능력과 영적 무능력의 구분
위의 논의 이후 종교개혁시대에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에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이 다시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에 대한 반박」에 대한 응답으로 루터는 1525년에 「노예의지론」이란 책을 썼다. 루터는 이 책에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의지를 세울 수 없으며, 그들의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두 사람은 처음에 중세교회의 부패상에 대해 함께 반대하고 비판했지만, 이 인간 이해에 있어서 성경적으로 무장된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견해의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라 노예의지론을 주장했고,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을 발표했다.
근대와 현대로 들어오면서 어거스틴과 루터, 혹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노예의지론이 성경적인 이해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복음전도운동의 상황에서 노예의지론은 그렇게 환영받는 가르침이 되지는 못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상황에서는 그 복음을 듣는 자가 믿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는 믿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할 수 없다는 무능력의 교리는 불필요한 가르침으로 간주되기 쉬운 것이다. 미국의 대각성운동이 전개되던 때에 이러한 노예의지론은 불필요한 교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정통신학자들에게는 하나의 과제요 고민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 대표적 인물이 청교도 신학자인 에드워드이다.
에드워드는 타락 이후의 인간의 상태를 자연적 능력(Natural Ability)과 영적 무능력(Moral, Spiritual Inability)의 개념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려 하였다. 인간의 의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는 중립적이지만 그 의지를 사용하는 인간의 주체인 마음(Heart)이 부패되었으므로 결국 범죄하게 된다는 방식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의 의지에 관한 한 그는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를 따를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며, 그것을 거부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추궁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자신의 의지를 그러한 방향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부패한 마음의 인도대로 죄를 향해 갈 수 밖에 없으므로 영적 무능력의 상태에서 범죄와 복음의 거부로 떨어지게 된다고 설명한 것이다.
에드워드의 구분이 후대의 신 학파(New School)에 의해서 자연적 능력을 강화시키고, 영적 무능력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비성경적인 입장으로 전락되기도 하였으나 에드워드 자신의 가르침 자체는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결국 인간이 죄를 짓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의 성경적 가르침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3. 결론
구원의 진리와 신자의 생활 속에서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의지가 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자신의 마음대로 관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태가 완전히 절망적인 것을 깨달은 사람 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도할 때 나중에 믿겠다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올바르게 성경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라도 믿으려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러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죽은 상태이므로 스스로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도, 찾으려 할 마음도 가질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들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만이 우리는 눈을 뜨게 되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어두움 속에 놓인 존재들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만이 구원의 은총의 절박성을 인식하게 되며, 또 오늘 나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그의 절대주권을 신앙으로 고백하게 될 때에 혼돈과 흑암의 세상을 살면서도 빛과 질서의 삶을 체험할 수 있으며, 죽음의 세계에 살면서도 부활의 삶을 맛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재의 현실과 하나님의 침묵의 현실 속에서도 임마누엘의 삶을 선취할 수 있으며, 분명한 역사의식과 목적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이 신앙 속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재창조의 영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을 죄인과 피조물로 인식하게 될 때에 비로소 자기를 만드신 분에게 예배의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이 피조물이란 말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부족한 존재이며,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뱅의 인간론에서는 인간에 대한 부정적이고 결정론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의 책임성과 재창조의 정신이 오히려 약화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또 칼빈은 완전타락을 믿으면서도 부패와 죄성을 구분치 않았으며, 구원하는 믿음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개념으로 생각함으로서 성령의 조명함이 없이는 성서라도 진정한 깨달음을 주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선택된 자들만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 점은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고집스런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강점을 갖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칼빈적인 신앙고백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교회 내에서의 신앙교육에 중요한 강점을 지닌다.
다른 한편에서 칼빈의 인간 본질론은 선택과 유기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결단의 보류와 방탕의 길을 걷게 할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잘 믿던 자라도 결과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고의적인 타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또 신앙의 배타성으로 인하여 자칫 전도의 대상을 유기자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다면, 약점으로 지적된 내용들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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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3.11
  • 저작시기2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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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39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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