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의 여운형의 리더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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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민족주의자 여운형은 누구인가

항일독립운동 시기에 성공한 여운형의 리더쉽

해방정국 하에서 실패한 여운형의 정치적 리더십

마무리

본문내용

있다. 여운형의 해방이후 민족통일노선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는 이러한 공통의 적과 아군을 가르는 전선이 불명확했다는 것이다. 항일 독립 운동 시기에는 민족통일전선이 의도하는 적은 ‘일본 제국주의’로, 동지는 ‘미국과 소련’으로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다양한 국내 세력들이 하나로 결집할 수 있는 ‘일제 타도’라는 강력한 유인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일본이라는 하나의 적이 물러가고 미국과 소련의 입김 속에 국내 세력들이 이데올로기 적으로 재편되는 상황 속에서 여운형은 변화된 정세에 대해 명확한 전선을 제시하지 못하고 당위적인 민족통일노선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공통의 적이 없이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당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동지라 설정한 미국과 소련 역시 여운형이 자신의 정치 노선을 관철시킴에 있어서 유리하게 작용하지 못했다.
좌우합작을 놓고 보더라도 그는 미국이라는 외부적 변수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였다. 여운형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한 목적은 좌우익을 망라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미소공위를 촉진시켜 통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 미군정 역시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나 그 목적은 미군정 자체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즉 조선 사람 자체의 통일전선 형성을 저지하는 한편, 중도좌파를 좌익진영에서 분리하고, 중도우파 중심의 우익진영을 강화하면서 좌익세력 일부를 끌어들여,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중도파 중심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성립시키려했던 것이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여운형과 미군정은 입법기구 설치 등의 문제에서 충돌한다.
한반도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많은 지지 기반을 구축했던 여운형은 해방 이후 권력 획득에 실패하는데, 이는 그의 ‘인식’의 문제 때문이다. 첫째는 ‘적’에 대한 인식이다. 그에게는 국가의 적, 민족의 적이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정적개념은 희박했다. 다른 파벌들이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여운형은 하나로 묶으려고만 했다. 두 번째는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이다. 여운형은 좌우익을 모두 아우르는 통일 정당과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했지만 좌우 양쪽 모두에서 배척당했다. 여운형의 시도는 당시 현실을 낙관적으로 본 데서 나타난 것으로, 정세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해방 정국에서 전개된 여운형의 정치노선은 원칙과 변혁을 일관되게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현실적 토대의 한계 혹은 더욱 약화되고 분해되는 정치적 근거로 귀결되곤 했다. 더군다나 여운형의 중도노선에 대한 국내정치세력의 끈질긴 반대와 미군정과의 관계 악화는 여운형의 변혁주의 노선을 차치하고 현실적 토대마저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보았을 때,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리더쉽은 실패한 정치적 리더쉽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마무리
여운형은 항일 독립 운동이 낳은 인물들 중 가장 민주주의를 잘 이해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민주주의 이념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보인다. ‘인간미 넘치는’, ‘건강함’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깨끗한 이미지와 신념과 이론을 바탕으로 한 능수능란한 언변 등으로 보아 여운형은 한반도 최고의 데마고그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족적 과제-독립-를 완수하기 위해 항일 독립운동 기간 내내 국내외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건준 활동을 통해 해방 이후 정국 안정의 초석을 마련한 점에서 그의 당대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해방 이전까지의 그는 당파적 이익을 떠나 자신의 생애 전부를 ‘민주주의 민족전선’ 그 자체로 살아온 민족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여운형에 대한 많은 평가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중도좌파 혹은 온건 좌파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지만,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주사회주의자, 진보적 민주주의자 등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굳이 그를 정의하자면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좌우 이데올로기의 틀로 그를 정의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가 주장했던 민주주의는 평등을 중심 가치로 보는 사회주의적 요소와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요소가 혼재된 이념이었다. 이는 이후 등장한 ‘제 3의 길’과도 연결된다. 그는 이념 대립을 떠나 민족의 자주라는 큰 틀 하에 최대한 현실적으로 좌우익을 포용하려 했다.
기존에 제시되어 왔던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벗어나 민족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여운형의 정치적 리더십을 터커(Robert C. Tucker)의 관점과 존 롤즈(John Rawls)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여운형을 실패한 리더십으로 치부할 수 없다. 터커는 정치적 리더십을 무리를 돌보는 예술로서 정리하였다.지도자의 ‘권력접근’ 성향은 비행기 조종사들이 바퀴와 레버를 조작하고 있다고 말할 뿐이며 왜 비행기가 날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다. 결국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라는 것은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의 행동에 방향을 제시하거나 방향제시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권력접근을 추구한 이승만과 대비되는 리더십으로 여운형의 정치리더십은 해방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가 설명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급박한 정치적 상황을 감안할 때 슈미트의 정치관이 매우 현실순응적인 것이라면 롤즈의 정치관은 이상주의에 가까웠다. 즉, 중간적인 것들이 오히려 중요하며 부각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롤즈의 관점으로 여운형의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한다면, 통일된 조국의 민족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이상적 정치사회의 건설은 이분법적 편가르기로 점철된 해방정국 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여운형만의 불요불굴한 정치적 리더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반도의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운형의 포용-조화를 위한-적 리더십은 한반도의 냉전 잔재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모델이다. 권력을 정치 행위의 목적이 아닌 뚜렷한 대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한 점과, ‘적과 동지’를 명확히 구분 짓던 이분법적 정치관을 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한 점에서 그의 리더쉽은 미래의 정치 지도자의 비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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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3.13
  • 저작시기2006.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9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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