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중사의 인식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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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민중사의 인식 방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대되기 시작하였다. 22일 오전 시민군은 시가전을 통해서 마침내 도청을 장악했다. 도청장악 후 광주는 완전히 시민에 의해서 통제되었고 시민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였다. 15인으로 구성된 수습위원회가 조직되어 원상복구와 사태수습을 모색했다. 그러나 23일 시민궐기대회에 참가한 시민은 무조건적인 원상복귀가 아니라, 비상계엄 철폐를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투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였다. 신군부세력은 항쟁을 조기에 진압하여 전국에 파급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결전을 가고한 시민군은 끝까지 도청에서 계엄군과 싸웠으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도청이 함락되고 광주민중항쟁은 일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상원을 비롯한 다수의 시민군이 전상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했으나, 군사독재의 재편음모에 정면으로 대향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은 또한 이후 민족민주운동세력에 중요한 투쟁경험과 인식지평의 새로운 확대를 가져다주었다. 한편 광주민중항쟁의 진압에 군을 동원한 것과 관련하여 미국의 책임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군의 동원은 미국의 허가 없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미국이 ‘1212쿠데타’, ‘517비상계엄 확대’, 광주민중항쟁, 전두환의 집권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군부를 통해 한국의 권력재편과정에 깊숙하게 관계했다는 의혹이 커졌다. 미국의 책임문제가 1980년 이후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의해 제기되면서부터 국민적인 반미의식은 더 분명해졌는데, 이는 반미운동의 대중적인 고양을 예고했다. 아울러 1980년대 전반기 민중운동의 성장은 광주 민주항쟁의 경험을 통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쿠데타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따라서 전두환 정권은 출발 직후버터 분명한 대미대일 예속정책을 실행했다. 1981년에 등장한 미국의 레이건정권은 소련에 대한 핵우위정책과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을 재무장시켜 동북 아시아지역에서 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일본 또한 나카소네정권의 등장 후 노골적으로 재무장정책을 추진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극동정책에 순응하면서 한국에서 미국의 지도력 확인, 주한미군철수중지, 지원 확약, 군사력 증강을 위한 경제협력 강화 등의 정책기조를 발표하는 한편 일본과의 군사경제적 유대를 긴밀하게 하려고 하였다.
2) 민중운동의 성장
광주민중항쟁 이후 주춤했던 민중운동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1983년경 ‘유화국면’을 맞이하면서 점차 회복되었다. 또 선진적 활동가의 주도로 운동이 이념적 조직적인 측면에[서 더욱 진전되었으며, 대중화되었다. 노동운동세력은 대중역량이 파괴된 직후 소그룹 중심의 활동에 주력하다가, 1983년 블랙리스트 철폐투쟁, 1984년 청계피복노조 복구대회 등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대중조직을 결성하였다. 노동자들의 조직적 투쟁은 기업단위 노동운동의 한계를 넘어서 연대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1985년의 서울 구로지역동맹파업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간답지 못한 삶을 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개선하려고 한 것이었다. 30여 명이 구속되고 1천여 명이 해고된 구로지역동맹파업은 규모면에서, 또 노동자가 투쟁 속에서 계급적인 연대의식을 분명하게 나태 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사상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후 구로지역 노동운동조직과 청계피복노조를 중심으로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이 조직되는 등 여러 곳에서 지역연대조직이 건설되었다. 농민운동은 1980년을 거치면서 기존의 도중심, 소수활동가 중심의 운동에서 점차 농민대중과의 실질적인 접촉을 통하여 군단위의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984년 함평 무안 농민대회는 군 단위 농민운동의 전형적인 예였다. 이 대회 후 함평농우회 결성을 시초로 종교단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농민 스스로의 힘으로 군 농민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군 단위의 조직들이 전국적 조직으로 연합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개방화정책으로 농민들의 타격이 특히 컸기 때문에 농축산물 수입반대투쟁이 1980년 운동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1985년에 전개된 농축산물 수입반대 및 소값 피해 보상투쟁은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제적생 복교, 해직교수 복직, 구속자 석방, 학원상주경찰의 축출 등의 투쟁을 전개하면서 1983년의 유화국면을 맞이했다. 한편 1983년 청년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다. 1984년 3월에는 대학별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학생운동 탄압의 수단이었던 지도휴학제와 강제징집 철폐를 요구했다. 이 투쟁을 통해서 1985년에는 ‘전국학생총연합’과 투쟁연합체인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특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은 대중적인 반미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반미의식은 1980년 광주미문화원 방화,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 등을 통해서 미국에 광주민중항쟁의 진압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반미의식의 표출은 비록 개인적이거나 소수에 의한 것이었으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면서 이후 ‘민족자주화운동’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85년 학생들의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은 반미의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게기가 되었다. 1986년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의 건국대농성은 학생들의 높은 결의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이것의 반성을 통해서 운동의 대중성에 대한 각성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1980년대 학생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렇게 각 부문운동이 활성화되자 각 지역운동과 부문운동을 엮어 하나의 대오를 이루려는 통일전선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1984년 결성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으로 통합되었다. 이 조직은 민중의 생존권투쟁에 대해 지지지원투쟁을 벌였으며, 헌법개정쟁취투쟁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1987년 6월 민중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1980년대 전반기 대중운동은 1970년대 민중운동을 계승하면서, 1980년대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을 통해 자주민주통일을 추구하는 민족민주운동으로 성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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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6.06.25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6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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