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대외관계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전기의 대외관계
1. 명과의 관계
2. 여진과의 관계
3. 일본과의 관계
4.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Ⅲ. 맺음말

본문내용

, 경제적 교역이나 문화적 교류에도 별 매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극적이었다. 그래도 조선은 동남아국가를 교린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예를 갖추고 사절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는데, 이 교린의 성격은 대등교린보다는 기미교린의 의미가 강하였다.
동남아국가들과 교역하는 형태는 기본적으로 사행무역이었다. 그들이 토산물을 진헌하면 조선이 회사하는 조공무역의 형식을 갖추었으며, 내용적으로는 진상에 대해 조선이 후하게 보상해주는 증여무역이었다. 그러나 사행무역에 수반하여 사신일행이 서울에서 개별적으로 물건을 매매한 기사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무역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교역물품은 남방물산이 중심으로, 그들이 가져온 진상물의 품목을 보면 약재 향료 염색재 유황 앵무새 등의 특산물이었으며 약재와 호초 등의 향료, 염색재료는 조선 측의 수요가 높았던 품목으로 반드시 포함되었다. 그 밖의 물건들도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것으로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 사치품목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조선 초기 교역을 통해서 조선의 선진 문물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Ⅲ.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전기의 대외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전기의 대외관계는 간략하게 사대교린의 관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명과는 사대외교를 펼치면서 중국의 연호사용, 중국황제의 책봉을 받는 등 능동적인 실리외교를 통하여 화친을 꾀하였다면, 여진과는 교린정책으로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했다. 회유책으로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했으며 조공무역을 허락했고, 강경책으로 4군6진을 개척하고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일본과는 여진과 같지만 왕의 존재라는 차이점을 바탕으로 교린정책을 실시하였다. 회유책으로 계해조약을 체결하고 제한된 무역을 허용했으며 강경책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했다.
조선전기 세계인식과 정책은 화이관에 바탕을 두면서도 현실성과 융통성이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사대와 교린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한 외교수단이었을 뿐이다. 대명관계에서는 상당히 탄력적이었고, 일본과 여진 관계에서도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란 후 17세기 전반기 조선의 사상계에는 극단적인 華夷峻別論이 강조되면서 외래문화와 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인식이 심화되었다. 조선전기의 소중화의식이 ‘朝鮮中華主義’로 더욱 강화되면서 수용대상으로서의 중국, 경쟁대상으로서의 일본, 새로운 문명권인 서양을 모두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결국 조선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수호자라는 조선중화주의론은 중화주의적 국제질서가 무너질 때 능동적 대응과 독자적 진로 설정에 실패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2-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5
◈ 김돈, 『뿌리깊은한국사샘이깊은이야기4-조선전기』, 솔출판사, 2002
◈ 하우봉,「조선전기 대외관계에 나타난 自我認識과 他者認識」, 전국역사학대회기조발문, 2003
*목 차
Ⅰ. 머리말
Ⅱ. 조선전기의 대외관계
1. 명과의 관계
2. 여진과의 관계
3. 일본과의 관계
4.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Ⅲ. 맺음말
  • 가격1,2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6.07.13
  • 저작시기2006.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878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