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의 정전제와 전국시대 토지사유제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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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주의 정전제와 전국시대 토지사유제의 발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서주의 정전제
1. 정전제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
2. 정전제

Ⅲ. 전국시대 토지사유제의 발달
1. 정전제의 와해
2. 토지사유제의 발달

Ⅳ. 맺음말

본문내용

확립을 위한 선행공작이었고, 개천맥의 결과 ‘부세가 공평해지고’,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編, 《강좌 중국사Ⅰ-고대문명과 제국의 성립》, 지식산업사, 1989, p.139.
이러한 천맥제는 그 토지소유관계를 사유로 볼것인가, 아니면 국유로 볼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아직까지 합의점이 조출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진나라는 천맥제를 통해 서주말기부터 진행되던 토지점유의 불균등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귀족들의 토지겸병, 즉 토지사유를 억제하려는 효과를 노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측면에서 토지사유제로 볼 수 있으나, 농민들의 토지소유를 국가가 관장한다는 점에서 토지국유제적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서주시대 정전제의 발달에 대해서, 그리고 정전제의 와해로 인한 전국시대 토지사유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살펴보았다. 정전제에 대해서, 서주시대를 봉건제시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노예제시대로 볼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인식을 달리하겠으나 현재적 관점에서 정전제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전제가 《시경》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너른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것이 없고, 바다끝 온 세상에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는 식의 완전무결한 토지국유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주왕이 제후이자 卿, 大夫, 士에게 봉토를 분봉했다는 기록 자체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거라 생각된다. 따라서, 정전제는 왕토사상에 입각한 명목적인 토지국유제였으며, 실제적으로는 ‘토지국유’의 개념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공동체의 자체규정에 의한 자연적인 토지분배 및 이용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즉, ‘토지국유’라는 개념은 국가가 토지를 총괄적으로 장악, 농민에게 분배, 受田民을 직접 지배했기 때문에 극히 인위적인 국가정책의 산물인데 반해, 周代에는 그러한 국가 기능을 상정할 수 없다고 보는게 그 이유이다.
중국사에 있어서 토지국유제에서 토지사유제로 변천되거나, 또는 토지국유제로 회귀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토지사유제가 점차 확립되어가는 역사 속에서, 당나라 때 시행되는 균전제(均田制)등의 토지국유제도는 기본적으로 서주시대 정전제를 그 모태로 하고 있다. 이처럼, 정전제는 古代에 있었던 유토피아적 토지소유제로만 생각하기에는 그 역사적 가치가 너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林甘泉외 2명(최덕경, 이상규 譯), 《중국고대사회성격논의》, 중문출판사, 1991.
趙岡, 陳鍾毅(尹貞粉 譯), 《중국토지제도사》, 대광문화사, 1985.
徐連達외 2명(중국사연구회 옮김), 《중국통사》, 청년사, 1997.
김택민, 《중국토지경제사연구》, 고대출판사, 1997.
李春植, 《중국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1995.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編, 《강좌 중국사Ⅰ-고대문명과 제국의 성립》, 지식산업사, 1989.
중국사연구실, 《중국역사-상권》, 신서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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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24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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