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한국의 도시 조사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 중국의 시대별 / 지역별 분류
1. 은(殷)·주(周)시대
2. 진(秦)·한(漢)시대
3. 수(隋)·당(唐)시대
4. 송(宋)·원(元)시대
5. 명(明)·청(淸)시대

■ 한국의 시대별 / 지역별 분류
1. 발해 상경용천부
2. 고구려 안악궁
3. 고구려 장안성
4. 신라 왕경도
5. 개성(철원 궁궐 / 개경 궁성)
6. 한성부(한양)
※ 기타 참고 도시(경주, 전주)

본문내용

다. 황극은 중립하여 사방에서 취정하는 것이라 했으니 중정을 강조한 것이다. 중정은 대중, 대중정으로도 표현된다. 그러니까 대중전은 대중한 정치, 즉 공평하고 바른 정치에 상하가 응하는 뜻을 지닌 건물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궁예는 주역과 서경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주역의 '태' 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국호 '태봉'에서도 나타난다. 태괘는 '지'가 '천' 위에 있는 형상이니 태봉은 천지가 교류하여 서로 잘 통하는 태평한 나라를 의미한다. 미륵을 자처한 궁예가 주역을 근거로 궁궐의 정전을 대중전, 국호를 태봉이라 한 것은 불교 위주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유학자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편전을 포정전이라 칭한 것은 주로 '정' 자를 붙여 정사를 보는 편전의 이름을 짓는 관행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위봉루란 명칭은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봉을 상징하였다. 봉은 신조인데 이것이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고 이것이 날면 뭇 새들이 따르며, 위의를 띠고 있기 때문에 위봉이라 한다고 한다. 위봉루는 위엄스러운 모습을 지닌 신조인 봉이 깃드는 대루였던 것이다. 위봉루 앞 광장을 격구하는 뜰이라는 의미인 구정이라 한 데에 태봉의 상무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궁예와 왕건이 사용한 철원 궁궐은 정전인 대중전, 편전인 포정전, 대중전 앞에 위봉루, 위봉루 앞의 구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외에도 침전 등 다양한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와 명칭은 개경 정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위봉루와 구정은 왕건에 의해 곧바로 재현되었다.
다음으로 개경궁성을 살펴보면 개경의 정궐은 태조 왕건이 2년 정월에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경)으로 옮기면서 창건되었는데 소규모이고 화려하지 않았다. 광종 12년에 대내 즉 송악 정궐이 중수되기 시작하여 14년 6월 무렵에 완공되었는데 대규모이고 화려하였다. 태조 이래 고려초기 개경 궁성의 주요 구조물은 정전인 천덕전(건덕전), 편전인 상정전과 중광전, 침전인 신덕전, 그리고 위봉루와 구정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정전인 회경전이 현종 20년 4월 여기에서 장경도량을 마련한 데에서 처음 확인되며,고려도경} 궁전에 따르면 그 북쪽에 장화전과 원덕전이 자리잡았다. 회경전이 제1 정전이 됨에 따라 기존의 정전인 건덕전은 제2 정전이 되었다. 현종 2년 정월 거란군에게 불탔던 정궐은 2년 10월∼5년 정월 제1차 공사가, 11년 8월∼14년 8월경에 제2차 공사가 진행되어 완공을 보았는데, 회경전은 이 무렵 신축된 건물로 판단되었다. 북한 장상렬의 연구에 의하면 북에서 남을 향한 회경전의 건축에는 31.2㎝ 정도의 자가, 그 북쪽 장화전의 건축에는 31㎝ 또는 그보다 조금 큰 자가 사용되었다. 회경전 건축군의 서북쪽에는 '서북건축군'이 자리잡았는데 여기에서 1∼4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가장 오래된 1문화층의 건축에 쓰인 자는 35.3 ㎝ 정도의 고구려계열 자가, 2문화층의 건축에서는 31.5 ㎝ 정도의 자가 쓰였다고 한다. 1문화층은 919년 송악 궁궐 건설로, 2문화층은 1011년 거란군에게 불탄 후의 복구로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서북 건축군의 제1 문화층은 35㎝ 계열의 고구려자를 썼으며, 이곳의 제2문화층과 회경전 건축은 31㎝ 남짓한 자를 썼다. 서북 건축군의 제1 문화층이 회경전 건축군보다 시기적으로 빠른 것이니, 서북 건축군이 회경전 건축군보다 먼저 조영되었던 것이다. 서북 건축군은 서에서 동으로 길게 늘어섰는데 전문은 동향을, 전은 남향을 하고 있다. 이는 이 건축군이 초기에는 동향이었다가 나중에 남향으로 개조된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심되는 건물은 동쪽에서 두 번째 아홉칸 짜리로 판단되는데 바로 제2정전 건덕전의 후신인 대관전으로 판단된다. 제1정전인 선경전(회경전)이 아홉칸이다.고려도경}에 따르면 서긍이 인종 초에 고려를 방문했을 때 건덕전은 다섯 칸이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불탄 후 재건되면서 선경전에 맞추어 남향으로 배치하고 부속 건물을 통합해 아홉칸으로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고려는 새로운 자를 사용하여 거란과의 전쟁으로 파괴된 건덕전 건축군을 복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동남쪽에 회경전 건축군을 신축하였다. 이로써 궁성 안은 건덕전 구역과 회경전 구역으로 양분되게 되었다. 서에서 동으로 자리잡은 건덕전 구역은 고유의 사고방식이, 북에서 남으로 자리잡은 회경전 구역은 중국식 사고방식이 반영되었으니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의 조화가 정궐의 궁성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6. 한성부(한양)
한양의 지형을 살펴보면 북쪽으로는 342m의 백악산, 동쪽으로는 125m의 낙타산, 남쪽으로는 265m의 목면산(남산), 서쪽으로는 338m의 인왕산의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고, 그 밖으로 북쪽에는 836m의 북한산, 동쪽에는 348m의 용마산, 남쪽에는 829m의 관악산, 서쪽으로는 125m의 덕양산의 외사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한양의 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한강이 띠처럼 둘러 있어 천연의 요새지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한양은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명당 선정하였다. 분지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와 통치에 유리하고, 중앙적 위치를 가지고 있고, 한강의 수운을 고려한 계획도시가 건설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시설을 배치한 내성과 외성을 쌓아 미로형 성곽도시이며, 15세기 초 인구 10만 명의 도시에서 17세기 후반에 20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한성부의 내부구조로는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배치를 원칙으로 하였다. 북쪽에는 궁궐이 있고 이들을 연결하는 6조 거리와 종로를 주요 도로로 두었다. 서쪽에는 사직단이있고, 동쪽에는 종묘, 남쪽에는 시전이 위치하였다.
위와 같은 배치는 지방 행정 중심지에도 적용되어 지방역시 성곽도시 건설을 추진하였고, 후기에는 정기시장 중심의 상업도시가 건설되었다. 한양의 거주지를 구분해보면 북촌에는 세도 있는 양반들의 거주지역, 남촌에는 가난한 양반, 하급 벼슬아치 거주지(현재의 남산 기슭), 중촌에는 중인들이 거주(현재의 종로구에 해당) 그리고 성밖에는 상민과 천민들이 거주하였다.
※ 기타 참고 도시(경주, 전주)
<조선시대 경주구성도>
<조선조 전주 도시평면>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6.09.09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338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