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당나라 요서지역과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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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만든다. 만약 백제본기 기록이 1년의 착오가 생겨 신라가 654년 8월에 당에 사신을 보낸 것을 표기한 것이라면, 654년 10월 고구려와 거란간의 전투는 신라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 당나라의 의지에 의해 거란군이 당군에 앞서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것으로 보게 된다. 결국 고구려와 거란의 전투는 당과 신라간의 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셈이다.
● 거란에서 물러난 고구려
당나라의 간헐적 공격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이후 고구려와 당나라간의 전투는 거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658년 6월 정명진과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의 적봉진(赤峰鎭)을 공격해 군민(軍民) 4백여명을 죽이고 포로 100여명을 사로잡았다. 이에 대장 두방루(豆方婁)가 거느린 고구려 군사 3만명이 적봉진을 탈환하기 위해 당군을 공격했으나, 당나라 장수 정명진이 거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군을 역습해 2500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659년 11월에는 설인귀가 계필하력(契苾何力), 양건방(楊建房)과 더불어 횡산과 석성에서 온사문(溫沙門)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무찌르고 토호진수(吐護眞水)에서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한 신문릉(愼文凌)을 구출했다. 설인귀는 또 660년 4월 신문룽의 군대와 함께 흑산에서 반당(反唐) 성향의 거란족인 아복고(阿復顧)를 습격해 사로잡기도 했다.
고구려는 송막(松漠) 또는 요해(遼海) 지방이라 불리는 거란, 해 지우두 종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오랜 역사적 연고를 갖고 있었다. 5~6세기 북위는 장수태왕(長壽太王)과 문자명왕(文咨明王)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인정해 이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우월적 지배권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북한 학계에서는 송막 지방인 임동, 적봉, 돌천현, 통료현에 고구려 성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또 고구려가 거란족, 해족의 거주지역에 당나라의 기미주와 같은 형식의 속령(屬領)들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적봉 지역의 성들은 고구려가 거란족과 해족의 일부를 통제하는 거점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속령들의 존재는 668년까지 그 지배력이 남아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5세기 이래로 지속된 고구려의 거란족 통제권은 660년을 기점으로 크게 깎이었다. 660년 4월 당나라가 거란과 해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진압하기 위해 아사덕추빈, 연타제진, 이합주를 냉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해족을 진압했고, 이들을 다시 사전도 행군총관으로 임명해 거란을 토벌하게 해 오복고를 잡아가 버렸던 것이다. 고구려군과 싸웠던 신문릉의 부대도 아복고를 잡는 데 합세했다. 당나라는 해와 거란을 토벌하고, 고구려군과도 맞서기 위해서 대군을 파견했던 것이다. 660년 4월 거란의 아복고가 당에게 끌려감으로써 고구려는 거란족에 대한 지배력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거란족과 해족은 당에게 저항해 660년 12월에도 당군과 전투를 하지만, 이미 거란족의 대부분은 당에게 복종한 뒤였다. 거란 지배권의 상실은 고구려에게 커다란 손실이었다. 고구려는 요서 지역에서 당군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신성 북쪽의 부여성도 당나라의 직접 공격대상이 됨으로써 방어의 취약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당군은 이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보급의 어려움을 일정 부분 극복할 수 있었고, 고구려를 더 광범위하게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당나라는 거란족을 장악한 후 고구려를 겨울철에 공격하기도 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군이 방한(防寒) 물자를 따로 준비한 탓도 있겠지만, 요서 지방에서 더 안전한 보급로를 확보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이로 인해 전통적인 청야전술(淸野戰術)의 사용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지연 전술을 펼쳐 겨울이 오기를 기다려 적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작전도 큰 효과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또 당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어 당군을 효율적으로 공략하는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거란 지배력 상실은 과거 설연타의 멸망보다 더 크게 여당전쟁(麗唐戰爭)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참고서적; 김용만 著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版 (2003년), 김용만 著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版 (1999년), 김용만 著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版 (2001년), 강준식 著 '연개소문을 생각한다' 아름다운책 版 (2004년), 이덕일 著 '고구려 7백년의 수수께끼' 대산출판사 版 (2000년), 이덕일 著 '오국사기' 김영사 版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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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22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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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8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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