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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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상화 시인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시인 이상화를 선택하게 된 배경
2. 기존 연구사 검토

Ⅱ. 시인 이상화
1. 시인 이상화의 생애
1.1 이상화 생애
1.2 이상화의 가계도
1.3 문학평론가 정영진의 글 중에서
2. 이상화 시세계
2.1 이상화 시작품
2.1.1 도쿄에서
2.1.2 나의 침실로
2.1.3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2 이상화 시세계
3. 시인 이상화의 주변 이야기
3.1 달성공원 시비와 관련하여
3.2 수성못 시비와 관련하여
3.3 이상화 고택과 관련하여
3.4 경주 아리랑

Ⅳ.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해 뿐이오, '나의 침실로'의 순수시로서의 가치는 영원한 것이다".
3.2 수성못 시비와 관련하여
대구가 낳은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尙火 李相和, 1901~1943))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詩碑)가 대구 수성못가에 건립돼 2006년 3월 15일 제막되었다. 광복 60주년과 수성구청 개청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 수성못가 지산하수처리장 상단공원에 세워진 이 시비에는 이상화가 1926년 6월 '개벽' 70호에 발표했을 때의 시 원문이 새겨졌다. 시의 문장들이 지금의 문법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살려 건립 의도대로 교육적인 효과도 기대해볼 만하며, 긴 시임에도 전문이 다 담겼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이번 '빼앗긴 들에도…' 시비는 특히 이 시의 시상을 떠올렸던 현장이 수성못에서 바라보이는 '수성들판'(유력한 설로 설득력을 가짐)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증폭된다. 이태수, 칼럼-'들은 되찾았지만 아직도 봄은…', <매일신문>, (2006.03.14)
3.3 이상화 고택과 관련하여
이상화 고택은 이상화 시인이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임종까지 2년 6개월 동안 생활한 공간이다. 2001년 중구청의 도로계획에 의해 고택이 허물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2002년 ‘이상화 고택보존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실시한 바 있다. 이후 건물 매입 등의 여러 문제를 거쳤으나 지금은 보수를 계획하고 있다.
'이상화 고택'이 2007년 하반기에 제 모습을 찾게 된다. 대구시는 중구 계산동에 자리한 이상화 고택을 보수하고 상화고택 인근 부지에 상화기념관이나 문학전시관을 지어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매일신문 06.09.04>
향토 출신의 이름난 작가를 기억하기 위한 문학관이 많이 건립되고 있다. 문학관의 건립은 단순히 시인과 소설가를 기억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지역과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창출한 것을 기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상화 시인 옛집 보존 운동이 펼쳐졌지만 아직도 옛집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내년에 보수를 한다지만 그 흔한 안내판도 하나 없고 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오래된 석류나무가 집 가득 자라고 있었다.
3.4 경주 아리랑
이상화의 애제자였던 작가 이문기는 스승인 상화 문집을 만들려고 원고 뭉치들을 넘겨받았지만 미처 문집을 만들지 못하고 북으로 갔다. 목우 백기만은 "상화는 대부분 시가를 지었고, 산문은 별로 쓰지 않았다. 가요로는 교남학교 교가와 경주 아리랑을 남겼다" 라고 밝혔다. 교남학교 교가는 아직도 대륜고등 교가로 불리면서 학생들이 삼천리 골골에 빛나는 샛별이 되기를 기원했던 상화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데, 경주 아리랑은 행방이 묘연하다. 행방이 묘연하다보니 이제는 상화가 경주 아리랑을 남겼다는 기록조차 긴가민가하는사람들이 적지 않다.
경북대 김기현 교수는 "나중에 학자들이 밀양아리랑, 광복군 아리랑 식으로 명칭을 구분하게 됐지만 막상 그 노래를 부르던 당시에는 지역명칭까지 붙여지지 않았다. 결국 경주 아리랑이란 경주를 노래한 것을 일컫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동국대 한상일(국립국악관현악단장) 윤겨스 등은 경주아리랑에 대해서는 들지 못했다고 밝혔으며, 경주문화원장 김태중(전 신라고 교장)씨나 진병길(신라문화원장)씨 등도 경주 아리랑의 행방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국내 민요연구자 이소라(문화재청 전문위원)씨는"특별히 아리랑 가사를 만들지 않아도 있는 시나 동요 구전노래 등에 아리랑 곡조를 붙여서 갖가지 아리랑이 많이 불렸다"면서 상화가 남긴 시 가운데'농촌의 집'이 아리랑 곡조에 딱 들어맞는 틀을 가졌다고 하였다. 민족시인 상화 탄생 100돌 봄은 왔는가 - (9)경주 아리랑의 행방은? -, <매일신문> 2001.08.06
Ⅳ. 결론
이상화를 문학사적으로 평가한다면 1920년대 문학의 선도적인 인물로서 순수의 낭만과 일제에의 저항을 함께 펼친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침실로>로 대표되는 초기 낭만적 성격의 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대표되는 저항시는 이상화를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침실로>에서는 시인 자신의 정열과 현실인식을 사랑하는 연인을 통해 노래하였으며 특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민족 정서를 기반으로 민족의 현실을 문제 삼으면서 순우리말의 일상 회화체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프로문학이 경직성을 보인 반면 거의 유일하게 유연성을 보일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
김재홍,『한국현대시인연구』, 일지사(1986)
김재흥,『이상화 저항시의 활화산』,건국대학교 출판부(1996)
대구문인협회,『이상화 전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루(1998)
박윤우,『한국문학작가론』4, 집문당(2000)
양승준 외,『한국현대시 400선』,월인(2004)
이기철 ,『이상화 전집』, 문장사(1982)
저자 불명, 「리상화와 그의 시 창작」,『조선문학사』, 학우서점(1964) ※ 북한 서적
논문 :
김은철,「김소월과 이상화의 시사적 위상」, 『비평문학』19호, 한국비평문학회(2004)
박철석,「이상화 시의 문학사적 연구」, 『한국문학논총 』제8.9합집, 한국문학회(1986)
이기철,「<나의침실로>의 재해석 」,『한민족어문학』15집,한민족어문학회(1988)
이기철,『이상화 연구』,영남대 박사논문(1985)
이상규,「멋대로 고쳐진 이상화의 시-자의적으로 왜곡된 방언 원래대로 복원해야-」『문학사상』,(1988)
정대호,「이상화의 시에 나타난 비극성 고찰」,『문학과 언어』17집, 문학과 언어학회(1996)
조두섭,「이상화 시의 근대성」,『우리말글』25호, 우리말글학회(2002)
언론 :
<매일신문> ,'이상화 고택' 내년 하반기 제모습 찾는다‘,2006.09.04
<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17)상화빙허육사의 운명, 2006.04.24
<매일신문>, 민족시인 상화탄생 100돌 봄은 왔는가 - (9)경주 아리랑의 행방은? -, 2001.08.06
<매일신문>, 이태수 칼럼-'들은 되찾았지만 아직도 봄은…',2006.03.14
<영남일보>, [역사속의 영남사람들 .52] 이상화 ,200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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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02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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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86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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