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고자한 성리학자 ,임윤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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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인이 되고자한 성리학자 ,임윤지당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생애와 저서
1, 그녀의 생애
2, 그녀의 용모와 성품
3, 그녀의 학문적 자질
4, 그녀의 저서 『윤지당유고』

◈ 교육사상
1.이기관
2.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3.인성론
4.성 평등론

◈ 임윤지당에 대한 요약 및 평가

본문내용

◈ 생애와 저서
1, 그녀의 생애
남성중심의 가치관이 뿌리깊었던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요순과 같은 성인을 목표로 하여 학문과 수행에 몰두했던 여성성리학자였던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은 영•정조시대에 강원도 원주에서 살았던 여성 유학자로 본관은 豊川이며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호 윤지당(允摯堂)만 전한다. 그녀는 평생 유교 경전과 성리학을 연구해 우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원리를 체득했고, 부단한 수양과 도덕적 실천으로 높은 인격을 완성해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윤지당은 함흥판관을 지낸 노은(老隱) 임적(任適•1685-1728)의 딸로 태어나 그녀의 형제 5남 2녀 중, 당시 화담 서경덕을 이어 기철학의 대가였던 녹문(鹿門) 임성주 (任聖周)의 여동생이자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의 누나이다. 부친이 양성(陽城•지금의 경기도 안성 양성면) 현감으로 부임하 던 해 태어나 다섯 살까지 그곳에서 성장한 그녀는 1725년에 부친의 임지를 따라 함흥으로 갔다. 2년 후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1728년 부친이 병사하자 이듬해 가족을 따라 청주의 옥화(玉華)로 이사했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여덟살 때였다. 그녀에게 아버지 역할을 대신한 인물은 둘째 오빠 임성주(任聖周)로 그 곳에서 오빠 녹문에게 유교경전과 사서(史書)를 배 웠다. 녹문는 훗날 조선의 10대 성리학자에 들 정도의 뛰어난 학자가 되는데, 윤지당에게 여성의 금기사항이었던 학문을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윤지당(允摯堂)이라는 호도 지어주었던 것이다.‘윤지당’은 동양의 이상적인 여성상인 중국 고대 문왕의 어머니 태임 (太任)과 문왕의 부인 태사 (太 ) 의 친정을 뜻하는데 주희(朱熹)의 윤신지(允莘摯)라는 말에 서 따온 것이다. 동생 임정주가 쓴 『윤지당유고』 유사(遺事)에는 윤지당의 호가 붙여지게 된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윤지당은 곧 유인의 어린 시절 우리 중형(임성주)이 명한 바이다. 대개 주자의 윤신지(允莘摯)의 말에서 취한 것인데 그 뜻인 즉, 지중(摯仲)의 뜻을 겸한 것이니 독신지임 (篤信摯任) (:믿음이 도탑고 책임에 정성을 다한다)과 같은 뜻이다. 우리 이종형 한정당 송공이 손수 도장을 새겨서 이를 주니 이로부터 집안에서 윤지당이라 자주 칭하였다.” 열아홉 살 때 한 살 아래인 원주 선비, 신광유(申光裕)에게 시집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그녀는 사당에 처음 배알할 때 하녀의 시중을 물리치고 손수 제기를 받들어 모시는 등 모든 행위가 ‘법도에 맞아’시댁 어른들에게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연달아 겪는 곡절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녀의 결혼생활 8년만인 영조 23년(1747년) 신광유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후에 설상가상으로 난산 끝에 낳은 아이마저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죽어버린 상황이라 자식 없는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남편이나 자식의 벼슬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외명부의 직첩도 받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집에서 그녀는 와병 중인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죽은 남편 이 후사가 없는 백부 신계(申啓)에게 입양된 관계로 양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40세가 넘어서 양자 재준을 들여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 말년에는 손자 손녀의 재롱으로 낙을 삼았으나, 불의의 사고로 아들 재준이 사망하여 또다시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그후 큰 오빠의 죽음과 형제들 중에 각별했던 오빠 녹문마저 떠나 그녀의 슬픔은 더욱 컸다. 『윤지당유고』속의 몇 개의 제문 중에 오빠 녹문에게 올리는 제문을 보면 그 마음의 상심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윤지당은 만년에 독서와 저술에 힘쓰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이러한 학문에의 노력으로 조선 초유의 여성성리학자가 된 그녀는 정조 17년(1793)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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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7.02.04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워드(doc)
  • 자료번호#39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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