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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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토지개혁의 이른바 제1단계(형태)

3. 토지개혁의 이른바 제2단계(식민지하 조선의 토지조사사업)

4. 토지개혁의 이른바 제3단계(전후 농지개혁)의 역사적 의의

5. 결언

본문내용

통과점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적인 성격의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해석에서 역사관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中村은 바로 잘못된 역사관에 사로잡혀 잘못된 역사해석에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中村의 잘못된 역사이론은 ‘소농’ 개념에 관한 잘못된 해석에 근원을 가지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소농은 단순히 규모가 작은 가족농이라는 의미로 봐서는 안된다. 그것은 전근대사회로의 과도기에 지배저긍로 나타났던 독립자영농민을 지칭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개념이다. 中村이 농업근대화의 시점을 예컨대 일본의 지조개정, 조선의 토지조사사업에서 찾고, 그 성격을 근대적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했던 것은 실은 이와 같은 소농 개념을 확대해석하여 자작농까지도 포함시켜 규모가 작은 농업경영을 전부 ‘소농’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광범위하게 성립했으므로 근대적 자본주의적인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되었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中村은 근대적중간적 지주제가 확립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에 의해 확립된 것은 근대적 지주제가 아니라 반봉건적 지주제였던 것을 확인해두고 싶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 비추어볼 때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1) 구래의 상급소유권이 배타적 소유권으로서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하급소유권은 완전히 부정당하였다. 식민지하에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농업에서는 구래의 기생지주제가 더 강화된 모습으로 재편되었다.
(2) 식민지하에서의 지주와 소작인의 계약관계는 형식적으로 대등한 자유계약 형식이었지만, 식량조차 확보할 수 없었던 다수의 소작인에게 지주와의 대등한 자유계약은 허구적인 것이었다. 토지탈취의 위협, 생살여탈의 운명을 지주들이 쥐고 있던 상황 아래서 총독부의 지배가 덧붙여짐으로써, 예전의 경제외적 강제보다도 더 강력한 사회적 강제 아래 방치되었다.
(3) 농업에서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는 어디까지나 ‘지대’였다. 지대가 잉여 전체를 흡수해가버리는 상황 아래서는 근대적자본주의적 이윤이 성립될 여지가 없었다.
이상이 이 글의 요지이다. 다만 한가지 덧붙일 것은 이 글은 中村의 사고나을 검토하는데 초점을 두었으므로 이것을 뒷받침하는 싱즉적 연구를 후일로 미루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저작 ≪토지조사사업의 연구≫가 발간되어 있으므로 후일 이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필자의 실증적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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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7.03.08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8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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