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친일파][을사오적][이완용][박제순][권중현][이지용][이근택][친일파청산][친일행위]일제시대 친일파 행동 양태와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심층 분석(친일파, 일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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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친일파][을사오적][이완용][박제순][권중현][이지용][이근택][친일파청산][친일행위]일제시대 친일파 행동 양태와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심층 분석(친일파, 일제시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제 시기 친일파의 행동 양태
1. 3.1 운동 무렵의 친일파
2. 일제 문화운동에 동원된 거물급 민족주의자
3. 내선일체의 기수들
4. 민족대표 33인 중의 훼절

Ⅲ. 을사오적
1. 친일파 이완용
2. 친일파 박제순
3. 친일파 권중현
4. 친일파 이지용
5. 친일파 이근택

Ⅳ. 결론

본문내용

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아 식민지화하는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에 의한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한국민의 배일감정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 같은 정부대신에 대한 회유?납치는 대신들을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구나 이근택을 비롯한 이들 정부대신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우세해지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하는 세력들로 변해갔다.
이미 1903년 9월부터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을미사변 때의 망명자에 대한 처분건 등을 내세워 정부대신 이지용, 민영철(閔泳喆), 이근택 등을 매수하는 데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지용은 1만 원에 매수되어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일본공사에게 보고하면서 조약 체결에 열심히 협력하였고, 당시까지 배일적이던 이근택은 일본의 위협을 받게 됨에 따라 생각을 바꾸어 서서히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비록 이근택이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해도 그로서는 완전히 일본과의 관계를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면서도 일본측으로부터 또한 신용을 잃지 않으려 하였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단지 협박?매수 때문에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정치적 수완이 탁월하였던 이근택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감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이근택이 비록 친러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었을지라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이근택 자신의 출세에 일본세력을 이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근택은 이미 일본에 매수되어 친일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던 이지용이나 민영철 등과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이근택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1904년 8월 22일에 \'외국인 고빙(雇聘)조약\'을 강요,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단행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05년 11월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위협을 통해 비밀리에 \'을사조약\'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소위 보호국으로 만들어 식민지화의 옥쇄를 더욱 조이기 시작하였다.
이근택도 일본측에 매수되어 적극적으로 조약 체결에 협조하였는데, 친러적인 혐의로 일본공사의 눈밖에 나 있던 터라 오히려 열성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이지용으로 하여금 일본공사관과 계속 연결을 유지하게 한다든가, 자신의 동생 이근상(李根湘)으로 하여금 일본공사관 사람들과 자주 접촉을 하게 하는 등, 친러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는 혐의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드디어 친러파라는 혐의를 풀고 을사조약 조인 이전인 9월 군부대신직에 오르게 되면서, 이근택의 친일행위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즉, 그는 30만원이라는 기밀비를 일제로부터 받고 궁중과 부중의 모든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일본에게 제보하는 등의 일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이근택은 을사조약의 조인에 협조한 공으로 조약이 체결된 그 다음해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을 얻고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Ⅳ. 결론
해방된 지 56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세기 속으로 민족사적 항해를 시작하고 있다. \'새천년\'이라는 단순한 수리적인 시간의 분절로서의 연대기가 마치 지난 세기가 겪었던 인류의 모든 갈등과 모순을 망각의 강으로 보내버리기라도 하듯이, 우리 주변에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미결인 상태로 영원히 매장해 버리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이미 역사적인 과거분사형이 되어버린 친일문제는 결코 이대로 역사의 소각장에서 한줌 잿더미로 흩날려 버려서는 안될, 밝고 떳떳한 민족사를 재창조하기 위한 절대절명의 과제임을 새삼 천명한다. 제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의 시각에서 친일문제는 청산되어야만 했었다. 다 아는 이유로 우리는 그간 민족사적인 이 중차대한 과업을 방기한 채 오늘에 이르렀고, 그로 말미암아 민족사적인 비극도 숱하게 겪었다.
‘친일파’ 문제는, 오늘날 그 당사자들과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거의 생존하지 않거나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그 문제를 처음 다룰 때와는 시대적 상황이 달라졌고 요구 또한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분명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광복 직후였다면 ‘일제 잔재 청산’이 법률적인 ‘처단’이나 ‘정치적인 해결책’이 모색되었어야만 했을 터이나, 오늘의 ‘친일파’ 문제는 오히려 ‘역사적인 청산’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사실 물리적으로 제재를 받을 대상이 생존하지 않는 상태에서 친일파 문제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청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친일문제에 대한 관용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실현가능한 방안이며 또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여 민족사를 재정립하고 나아가 민족통일을 위한 화해와 일치의 기틀을 마련해 보려는 고민스런 모색이기도 하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반성할 주체가 이미 사라진상황에서도 유사한 잘못이 끊이지 않고 오히려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우리의 사회풍토를 개선하기 위한 선언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잘못된 정신문화를 개선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촉매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친일파를 거론하는 문제가 당대의 어떤 ‘정치적’인 의도나 목적에 이용되거나 연좌제처럼 악용되어 관련 후손들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도 안된다. 그런 의도가 개재되면 오히려 친일파 청산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켜 민족적?역사적인 이 작업에 장애가 될 소지도 있다.
우리의 친일인명사전 작업은 ‘죄악과 추악상을 하나라도 더 많이 발굴’하려는 게 아니라 ’막연하고 추상적인 혐의나 의혹된 사실들을 하나라도 줄여’ 적확(的確)한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최소한의 사실확인으로 최대한의 정의를 실현하려는데 있다. 종래 친일파에 대한 정의나 개념 정립 및 그 역사적인 청산이 지연됨에 따라 일제 강압통치 아래서 불가피하게 생존적인 직능에 종사했던 다수의 국민들조차도 ‘가상 친일파 피해 컴플렉스’의 굴레에 갇혀 이 문제가 거론되면 알레르기성 반감을 야기시키는 예도 허다했던 바, 따라서 우리의 작업은 이를 불식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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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1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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