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회담과 독일문제 그리고 독일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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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얄타회담과 독일문제
1. 분할문제의 연기
2. 배상문제 및 공업제거문제의 연기
3. 독일 영토 제한의 연기
4. 프랑스와 4대강국의 독일통제문제
5. 얄타회담과 독일문제의 의의

Ⅲ. 독일의 통일
1. 독일의 분단과정
2. 독일의 통일과정
1) 독일 통일의 내적요인
2) 독일 통일의 외적요인
3. 독일 통일의 의의

Ⅳ. 결론을 대신하여
- 독일 통일과 얄타체제의 붕괴

본문내용

다는 공통된 인식이 유럽 국가 간의 통합 필요성을 부추겼다.
2차 대전 4대 전승국들이 통독에 절대적 반대를 직접적으로 표명할 수 없었던 것은 동서독 연합형(聯合形) 국가구조가 유럽통합의 동구권 진출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EC 통합 주창 국가인 프랑스가 유럽의 통합에 배치되는 입장을 대외적으로 표명할 수 없었던 것이며, 소련 역시 유럽 공동의 집이라는 독자적인 유럽통합 구상에 배치되는 입장을 취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통일의 대외적 요인 중에서 유럽의 장래 진출 분위기가 ‘유럽은 하나로’라는 유럽형통합구상(Solidaritat) 조류가 적합하게 통독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3. 독일 통일의 의의
독일통일의 특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체계가 오랜 내적 안정의 단계를 거친 후 갑작스럽게 몰락하였다는 점, 시민들의 비폭력적, 평화적 혁명에 의해 공산주의 독재가 무너지고 통일이 달성되었다는 점, 서독 정부가 국제 정세의 변화를 통일에 유리하게 이용하였다는 점, 서독의 정당들이 동독에서의 반대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는 점, 그리고 동독의 독재정권이 시민의 거부를 폭력적으로 다스리지 않고 관용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동독의 몰락한 ‘실제 존재하는 사회주의체제’는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라는 사회주의 목표를 상실하고 순전한 권력유지의 정치만이 행해졌던 전체주의 사회로서, 근대화가 결핍된 특수한 관료제적 지배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40년간의 전체주의 지배체계 속에서도 동독의 시민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높은 정치적 성숙을 보여주었다. 혁명과 통일의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심지어는 백만 명이 대립된 의견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으로 시위를 마치는 기적 같은 성숙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통일은 ‘2+4회담’ 이 회담은 독일에게 큰 의미가 있었는데, 첫째 동서독이 과거와 같이 4개국의 합의나 결정사항에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협의하기로 한 것, 둘째 4개국과 협의할 내용은 독일통일과 관련한 대외적인 문제에만 국한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으로 귀결되었다. 동서독과 제2차 대전 승전 4개국 외무장관들은 1990년 2월 13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를 개최하여 통일독일을 승인하기로 결의했다. 2+4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독일은 대내외적으로 완전한 주권을 되찾게 되었으며 통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모두 제거된 셈이었다.
통일 후 동독의 급속한 사회변혁은 ‘만회하는 근대화’로서 요약될 수 있다. 그리하여 동독지역에서 복지수준의 향상과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사회적 상승의 정치화와 하향 평준화의 극복도 달성되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독주민들에게는 ‘식민화’의 감정과 아노미적 현상이 야기되고, 동서독간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증대되고, 근대화 쇼크를 낳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탈근대화를 초래하고 있다.
Ⅳ. 결론을 대신하여
- 독일의 통일과 얄타체제의 붕괴
1980년대 후반 동독,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국가 내에서 이루어진 혁명은 동구 사회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이와 함께 독일의 통일은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냉전체제의 종식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동구 사회주의의 종식의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통일 독일은 독일 민족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민족자결권의 완성을 뜻하며, 동독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미완성의 혁명이었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긴박하고 신속한 통일과정을 통해 독일인은 평화적 타협에 의한 법적제도적 통일을 이루었다. 비록 통일의 형태는 동독이 서독에 통합되는 흡수통일 방식이 선택되었으나 독일 민족의 통합이라는 측면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일통일은 국제적 측면에서 냉전의 종식과 얄타체제의 붕괴의 큰 요인이 되며, 이는 유럽이 통합의 길로 나아가 동서유럽의 화해와 협력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독일의 통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인 얄타체제가 붕괴되는데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2월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모였던 얄타회담은 동서냉전체제와 이념대립이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이러한 얄타체제는 1989년 12월 조지 H 부시와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몰타회담으로 끝을 맺었다. 몰타회담은 냉전 체제 해체와 군비경쟁 축소, 중동남미지역 경제원조, 나토와 바르샤바 기구의 군사동맹에서 정치 연합기구로 변화 모색을 위한 냉전이 사라지게 되는 주요 원인을 제공하였다.
얄타체제의 시작과 끝에 있는 두 회담은 미국과 소련 양대국이 결정하여 세계사를 변화 시킨 것, 공산주의 이론이 70여년 만에 그 실패로 끝났음을 예고하는 것, 소련은 현실적으로 군비증강이란 문제가 국민경제와 국가 존속에 큰 장애였음을 시인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얄타체제 및 동서 냉전의 시기가 붕괴된 후, 국제사회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이데올로기보다는 경제적 실리를 우선시 하게 되었으며, 국가간 자유무역, 교류 급증 등 세계화가 가속화되었다. 또한 EU, ASEAN 등 지역 기구의 중요성 강화되는 지역블록화 현상이 나타났고,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인종집단의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었다. 이는 독일의 통일이라는 역사의 결과가 이러한 국제사회 질서 및 가치의 변화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입증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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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조. 「얄타회담과 독일문제 - 연기의, 정책의 이해를 중심으로」, 1992.
이삼성. 「세계와 미국 - 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2001.
조지프 S. 나이 「 국제분쟁의 이해 - 이론과 역사」, 2002.
한국미국사학회. 「사료로 읽는 미국사 - 궁리미국총서 01」, 2006.
김동철.「오스트리아통일과 독일통일 要因의 比較 分析 (A Comparative Analysis on Determinants of Austrian & German Unification)」, 『崇實大學校 大學院』, 숭실대학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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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5.02
  • 저작시기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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