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경주의 문화재][경주 답사 기행문][경주 답사][경주 기행문]경주와 경주의 문화재 답사 기행문(경주시 개요, 불국사, 양동민속마을, 괘릉, 석굴암, 김유신묘, 천마총, 안압지, 석빙고, 분황사, 반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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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주][경주의 문화재][경주 답사 기행문][경주 답사][경주 기행문]경주와 경주의 문화재 답사 기행문(경주시 개요, 불국사, 양동민속마을, 괘릉, 석굴암, 김유신묘, 천마총, 안압지, 석빙고, 분황사, 반월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경주시 개요

Ⅱ. 삼릉골마애관음보살상

Ⅲ. 용장사터(용장골)

Ⅳ. 불국사

Ⅴ. 양동 민속 마을

Ⅵ. 괘릉(掛陵)

Ⅶ. 석굴암

Ⅷ. 김유신 묘

Ⅸ. 천마총

Ⅹ. 안압지

Ⅺ. 석빙고

Ⅻ. 분황사

ⅩⅢ. 반월성

본문내용

덕왕 14년(755년)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 이 절에 봉안하였다.
역사가 오래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듀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 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과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1) 분황사 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소재 분황사 경내에 있는 높이 9.3m의 신라 시대의 석탑이며 국보 제 30호이다. 안산암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서 , 선덕여왕 3년(634)에 분황사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차례 보수되어 어느정도까지 원형이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 기단은 한 변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 단측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 밑이 약 36cm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있으며,탑신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에 가까운 인왕상을 배치하였으며 두짝을 돌문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의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의 1층 네 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 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장중한 감을 준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하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 때 제 2층과 제 3층 사이에서 석함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침통,금 은제 가위등은 경주 박물관에 있다.
(2) 삼룡변어정
지금도 관광객의 목을 축여주는 분황사의 우물은 신라 시대에 만든 것이다. 우물의 겉모양은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의 원형은 원불의 진리를 상징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 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왔다고 한다. 그 뒤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부터 천년 전에 만들어졌던 신라 시대의 우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남아 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서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3)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97호인 이 비는 숙종 6년(1101년)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기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에는 방치되어 있었던 듯 비신을 받쳤던 비대가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이라고 써놓았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
ⅩⅢ. 반월성
반월성은 반달 모양으로 구릉을 깎아 군데군데 반월꼴로 토석을 섞어가며 성을 쌓아 궁의 주위를 감싸안은 성이다. 신라시대에는 이 반월성 주변으로 많은 궁궐들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을 한다고 합니다. 반월성 근처에 있는 안압지도 많은 궁궐들 중에 하나이고요. 계림숲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궁궐터로 추정이 되는 곳에 다가 주춧돌만 복원해 놓은 것을 보실 수 가 있을 것입니다. 반월성에는 시대가 다른 유적이 한군에 있지요, 다름 안닌 석빙고 인데요,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조선 영조때 조성된 것이라고 하네요. 영조는 석빙고를 여러 곳에 조성을 하게 했다고 하는데 현재 서너 곳에 석빙고가 있는데, 반월성의 것이 가장 완벽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압지에 얽힌 설화를 빠뜨릴 순 없겠지요? 석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서쪽 육촌을 바라보니 반월 모양의 땅이 무척 좋아 보였다. 곧 이곳에 와서 보니 당시 신라의 중신 호공의 집이었다. 탈해는 이 집을 자기 수중에 넣으려고 한 가지 계략을 꾸몄다. 호공 집 주변에 몰래 숫돌과 쇠붙이, 숯들을 많이 묻어두고, 이튿날 호공을 방문하여 \"이 집은 원래 우리 조상들의 집이었으니 집을 내달라\" 고 하였다. 호공은 크게 놀라 그 증거를 보이라 하였다. 탈해는 서슴지 않고 \"우리 조상이 여기서 오래 살다가 잠시 다른 나라로 간 것이오. 집터 주변을 파보면 확실한 증거물이 나올 게요. 우리 조상들은 원래 쇠를 다루던 대장장이였소\" 하고 당당히 말하였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호공이 시비를 가려달라고 관청에 송사를 걸었다. 드디어 재판 날 탈해의 말대로 집 주변을 파보니 과연 숯이 많이 나왔다. 이에 관원들은 탈해의 집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내막을 알게 된 2대 남해왕은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여 사위로 삼았다. 그후 탈해가 왕이 되자 이곳을 왕성으로 정하고, 5대 파사왕 때 석벽을 쌓아 훌륭한 성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최초의 궁궐터로 알려진 창림사터가 후대의 궁궐처럼 장엄한 기와집이 아니라 풀로 지붕을 덮고 나무울타리를 두른 간단한 시설이었다면, 반월성이야말로 성곽을 두르고 전(殿)이나 궁(宮)을 세워 궁궐다운 면모를 갖춘 최초의 궁궐이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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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1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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