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의 리더십과 중국사에 미친 영향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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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마오쩌둥의 리더십 ※
서론

※마오쩌둥의 리더십
1. 리더십의 형성과정
1) 농가의 장남으로 성장
2) 학창시절에서 공산당 가입까지
3) 역사적 배경 - 혼란스러운 당시 중국의 사회상황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형성)
2. 마오쩌둥의 리더십
1)농민운동 - 혁명적 리더십의 발아
2) 대장정과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 인민의 영웅으로 등극
3) 백화제방과 반우파 투쟁 그리고 대약진 운동 -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결과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리더십 -실패한 리더십
1.문화대혁명
1) 문화대혁명의 배경과 전개
2)문화대혁명의 주요 내용
2.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3. 4인방과 문화대혁명

결론

본문내용

마오쩌둥은 James MacGregor Burns가 주장한 변혁적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그는 대중을 움직이는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통해서 알 수 있듯 마오쩌둥은 대중에게 목표를 제시하였고 강직한 성품이나 청렴한 생활, 희생정신으로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법을 알았다. 특유의 현실감각과 통계와 조사를 중시하던 과학적인 분석능력으로 농민들이 가진 혁명의 잠재력을 깨달아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려했으며, 농민들을 대장정기간에 홍군으로 만들어 공산당 세력을 확장하는 기지를 보였다. 만약 마오쩌둥이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결여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면 국공내전당시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킬 만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며, 현재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마오쩌둥의 리더십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와 함께 전환점을 맞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권력의 힘을 느끼면서 독재권위주의에 빠져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문혁에 주장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중국식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었지만 당시 마오쩌둥의 권좌는 마치 황제의 자리와 동일 한 것이었다. 그의 통치방식은 봉건전제주의 적이었으며 심지어 그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변혁적 리더십의 카리스마도 대중조작술로 변질됐다. 홍위병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을 움직였지만 결과적으로 권력유지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고, 부도덕 했으며 시대를 황폐하고 병들게 만들었다. 또한 그들에게 일정의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중국대륙은 파괴와 광란으로 휩싸였고 엄청난 경제문화적 퇴보를 겪게 되었다. 아직도 많은 문혁의 피해자들은 지난날의 고통을 기억하며 몸서리 치고 있으며, ‘하방’ 조치된 많은 지식인들은 삶의 기반을 잃었고 빈곤한 삶을 사는 등 문혁의 후유증은 아직도 중국 곳곳에 잔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중국사회가 마오쩌둥을 기억하려는 혹은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현대 중국인들이 마오쩌둥을 회고하고자 하는 것에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빈부격차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덩샤오핑이 집권한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을 슬로건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독특한 시도를 감행했다.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이라 하여 흰 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성장논리로 자본주의를 도입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급속히 유입된 자본주의로 인해 빈부격차는 계속 급증하고 있다. 농촌에는 돈이 없어 굶어 죽는 빈민이 있는가 하면 도시에는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존재하고,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중국 인민들은 소위 그들이 일컫는 ‘팡뉘(房奴)’ 즉, 집에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 불만이 생기자 “마오쩌둥의 시대가 좋았다”, “마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에 살기 편했다”, “그 때가 깨끗했다” 는 등 그를 회고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21세기 중국의 실상이 그의 좌익오류라고 할 수 있는 문화대혁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를 회고하게 만드는 첫 번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체계적인 신격화의 결과라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사상을 종교적으로 추앙하고 그의 추상화를 보물처럼 아끼는 세뇌된 인민들의 의식에는 마오쩌둥은 곧 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공산당과 후진타오 정부의 전략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본주의 물결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체제가 흔들린다는 것은 공산당 입장에서 매우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도 1989년 6월 4일 천안문사태가 발생한 이후 중국인들의 의식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금전 위주의 사고방식과 정치 내지는 이념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1992년 초 덩사오핑의 남순강화이후 해일처럼 밀려드는 상품 경제 물결 속에서 중국인들의 가치관이 급속히 금전 위주로, 극단적으로는 배금주의로 치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2,3세대 지도부의 수장인 덩샤오핑과 장쩌민이 주도한 개혁개방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마오쩌둥의 개혁노선을 지지하고 그의 농촌운동을 부활시킴으로서 사회주의체제를 보다 굳건히 하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평가를 미루고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여론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에서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을 검색하는 것은 금지돼 있으며 심지어 형사처벌을 받을 수 도 있다. 그런 반면 대장정 기념행사 준비에는 전국이 떠들썩할 정도로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지도자가 정책에 실패하면 반드시 그 책임을 지고 숙청당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고, 소련의 반스탈린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사후에라도 그의 이념과 노선이 심판대에 올라 역사의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했지만, 문화대혁명과 같은 동란으로 전 중국을 파국과 혼란으로 몰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예외였다. 그것은 그가 직접 혁명을 지도하여 중국에 공산정권을 수립했고, 그 후에도 계속 중국을 통치했다는 점에서 만약 현 중국 지도부가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을 가해 反마오쩌둥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을 스스로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죽의 장막을 열어 세계를 맞았다. 홍콩은 반환되었고, 2008년에는 성장과 발전의 상징인 올림픽도 개최한다. 소련은 무너졌고 사회주의 진영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세계 1위를 자부하는 미국마저도 그들을 경계한다. 마치 중국은 세계화에 선두주자처럼 보인다.
현재 중국의 젊은이들은 대학에서 배우는 마오쩌둥의 사상을 지루해하는 과목으로 꼽는다고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아직도 마오쩌둥이 그 근간을 다진 사회주의체제라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교훈과 같이 중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중국을 알아야 한다. 곧 중국을 알려면 마오쩌둥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아직도 인민의 자전거바퀴가 회전하는 천안문 광장에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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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28
  • 저작시기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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