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에 대한 조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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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文化大革命 』
문화대혁명(1966~1969년)

1. 배경

2.공산당 창당이후 건국, 문화대혁명 과정을 요약한 글
1)전주곡
2) 주요세력
3) 권력변화
4)사회, 경제(평균주의의 시대)
5) 대외정책: 1969년 중소 국경분쟁은 대미접촉을 촉진

3.文革의 특수한 성격

4.문화대혁명 시기
1)1966년 5월 문화대혁명 발동에서 1969년 4월 중공구대태계(中共九大召開)까지
2)중공구대(中共九大)부터 1973년 8월 중공 제10차 전국대표대회까지이다
3)중공십대(中共十大)

5.문화대혁명의 전개의 3가지 의견
1)권력 쟁탈설
2)당시 국제 상황을 들고 있습니다
3)모택동(毛澤東)과 4인방(四人幇)

6.오늘날의 평가

7.결과

8. 주요사건 일지

9.내 생각

※사진으로 본 문화대혁명※

①천안문 광장 군중집회에 나선 임표와 강청
②홍위병의 집회와 대규모 군중비판대회
③한 손에 모택동어록을 치켜든 군중들의 시위
④문화대혁명 기간 중 수난을 받고 있는 중국의 문화 유산물들
⑤온통 뺏지로 뒤 덮힌 홍위병의 자랑 스런 얼굴
⑥흑룡강성 혁명위원회의 설립--붉은 깃발, 붉은 바다
⑦홍위병 지도자의 과거와 오늘(붕대부)
⑧홍위병 지도자의 과거와 오늘(韓愛晶)

본문내용

화와 같은 것으로 단죄되었다. 사진에 보이고 있는 모든 유물들, 청동기제품, 불상, 불화, 각 종 도자기, 생활 수품이 아닌 문화유품은 모두가 봉건잔재였고 그런 물건을 소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직도 봉건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었기에 개인이 더 이상 소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다른 사진에 보면 젊은 청년들이 모든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부셔 버리고 또 그 행위에 환호하는 홍위병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사진은 사원 앞에 불상을 내놓고 공개 비판할 때 사용하던 고깔모자를 씌운 뒤 봉건사상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적어놓았다. 불상의 머리와 팔다리는 잘려지고 얼굴에는 모욕적인 선을 그어놓았다.
⑤온통 뺏지로 뒤 덮힌 홍위병의 자랑 스런 얼굴
이 사진은 왕국상(王國祥)이라는 군인이 농민들에게 자신이 모택동 저작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을 이야기 하자, 그의 강연을 들은 농민들이 그에게 모택동 초상으로 만들어진 뺏지를 온 몸에 달아줌으로써 왕국상을 통해 모택동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고, 아울러서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사진이다. 모택동 어록을 손에 들고서 온 몸에 모택동 뺏지가 가득한 왕국상의 표정 역시 순진무구함과 어떤 경건함이 담겨져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혁명을 이끌었던 주요 동력은 역시 홍위병이었으며, 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노동자, 농민, 병사(工農兵)이라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이들의 순수한 열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고, 대중을 이끌어 내는데는 모택동만한 인물이 없었다.
⑥흑룡강성 혁명위원회의 설립--붉은 깃발, 붉은 바다
모택동은 1967년 초 "모든 권위를 반대하여 그들로부터 권력을 뺏어오자(造返奪權)"는 구호를 내걸었다. 위 사진은 모택동의 호소에 뒤따라 흑룡강성에 성립된 혁명위원회를 축하하기 위하여 열린 군중집회의 모습이다. 모택동의 대형사진을 앞세우고 모인 군중들은 혁명이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전락한 당 지도부로부터 민중들이 권력을 다시 뺏어와야 한다는 모택동의 주장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실제로 모택동의 이러한 호소가 있고 난 뒤, 당시 중국의 수상이었던 유소기, 중국혁명의 노 간부이자 군부의 최고 지도자였던 팽덕회로부터 시작해서 전국적인 모든 당 기구는 혁명 위원로 대체됨으로써 국가기구는 거의 마비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중집회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문화대혁명이 내건 구호들에 그렇게 열성적이지는 않는 것 같다. 관제 집회가 모두 그렇듯이 행정 단위별로 모인 듯한 군중들은 따뜻한 햇볕아래 쭈그리고 앉아 집행부가 서있는 곳과는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모습도 보인다.
⑦홍위병 지도자의 과거와 오늘(붕대부)
홍위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소위 문혁 초기의 '보수파'와 중기 이후의 '조반파(造返派)이다. 보수파 홍위병들은 대부분 고급간부의 자녀들로 이루어졌고, 혁명의 후세대임을 자처하면서 자신들의 학교에서 학교장과 교원들을 비판하고 나아가서 사회의 반동적인 인사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혁이 반년이 채 못 되어서 혁명의 칼끝이 자신들의 부모로 향하게 되자 보수파가 되었다. 소위 '조반파'는 고급간부의 자제가 아니라 일반 군중들로부터 자생되었거나 일반 간부들의 자녀들이었고 그들은 권력을 가진 당의 고급간부들을 비판하였다. 소위 조반파의 지도자였으며 당시의 수상이었던 유소기를 비판함으로써 일약 유명해진 붕대부는 당시 청화대학교 학생이었고 조판파 조직인 "정강 산병단"의 지도자였다. 1966년부터 1968년 까지 2년 동안 그의 활동은 전 중국을 홍색공포로 몰아넣을 정도였다.
그러나 68년 노동선전대가 대학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해 70년 영하성으로 재 배치 되었고, 78년 북경시 공안국에 의해 반 혁명죄로 체포되어 83년에 17년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987년 출옥하였다. 87년 출옥 후 결혼한 붕대부는 92년 산동성 봉래시의 한 향진기업에 취직하였다가 93년 북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유소기의 부인 왕광미(王光美)와 당의 지도급 인사들에 의해 다시 강소성 상주로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이후 심천으로 직장을 옮겼으나 지금은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위 사진의 오른쪽은 문화대혁명 당시 혁명정신을 드높이며 국가의 최고지도자까지 거침없이 비판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던 당시 붕대부의 모습이며, 왼쪽은 출옥한 후 뒤늦게 결혼하여 가족들과 함께 영하성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⑧홍위병 지도자의 과거와 오늘(韓愛晶)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당시 한애정은 20세였다. 그 역시 북경 항공대학의 '홍기전투대'의 지도자였으며, 수도권 대학 홍위병대표자회의 핵심 조직원이었다. 그러나 68년 노동자선전대가 대학으로 들어온 후 비판을 받고 호남성 주주(株州)로 배치되었으며, 78년 체포되어 83년 15년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다. 90년경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나는 당시 홍위병 운동에 참가하여 해방군의 원수였던 팽덕회 장군을 공격하고 심지어는 직접 두들겨 패주었던 것을 몹시 후회한다. 그렇지만 과연 그때 팽덕회의 개인 경력을 자세히 알고서 청년들에게 팽덕회는 반당반사회주의 분자라고 소리쳤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하는 의문이 든다" 섭원재가 홍위병 지도자였다는 사실 자체는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었다. 그녀는 항일전쟁 시기에 공산당에 입당했던 고급간부였으며 66년 북경대학 철학과 공산당 총지부 서기였으며, 45세라는 나이는 이미 홍위병의 엄마뻘 되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북경대학에서 첫 번째로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를 썼다는 것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68년 노동자선전대에 의해 비판을 받았지만, 69년 중국공산당9차대표대회의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83년에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84년에 출옥하였다. 섭원재는 그 이후 사업에 눈을 돌려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고급 간부들과의 관계를 이용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사진의 오른쪽은 팽덕회를 비판하고 직접 구타가지 했던 한애정의 최근 모습, 왼쪽 사진은 문혁 당시 이름을 날렸던 섭원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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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14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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