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항쟁, 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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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18 광주 민주항쟁, 민중항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1) 쟁점의 발굴 과정
2) 쟁점의 정의

2. 광주민중항쟁 이전의 사회상황
1) 경제적 배경
2) 정치, 사회적 배경

3. 광주민중항쟁의 전개과정
1) 항쟁의 전개과정을 다섯 시기로 구분
2) 광주민중항쟁의 구체적인 사건일지
3) 항쟁 발생의 직접적 원인 고찰
4) 미국 문제
5) 언론의 왜곡

4. 광주민중항쟁 이후의 고찰
1) 진상규명
2) 광주민중항쟁 이후 사회운동의 방향
3) 광주민중항쟁 이후 지역감정의 심화와 왜곡

5. 결론

본문내용

범민중항쟁의 구심점을 형성하였다. 박세길,『다시쓰는 한국현대사 3』 -1980년에서 90년대초까지,1992, 돌베개
3) 광주민중항쟁이후 지역감정의 심화와 왜곡
앞서 살펴보았듯이 518광주민중항쟁의 구조적인 원인은 지배피지배 모순이 광주, 전남지역에 중첩적으로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라도 민중과 경상도 민중간의 갈등이 아니라 전라도 민중과 지배집단간의 갈등이라는 구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배집단에 대한 저항이 지역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 조건은 항쟁의 실패로 인해 역으로 광주전남지역에 대한 더욱 심한 차별로 나타난다. 물론,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과 함께 전체 사회운동진영은 이전과는 다른 사회 변혁적,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화화고 지역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군부의 강력한 통제는 광주민중항쟁의 성과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게 했으며, 오히려 신군부의 억압에 밀려 운동진영내 일정한 분화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선 광주민중의 필사적 저항을 짓밟고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집권기간 내내 정통성 문제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은 정치권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광주민중항쟁이 큰 원인이 된다. 신군부 세력은 그만큼 집권 기간동안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는데, 이는 언론탄압과 통제를 통한 지역분할에 의해 수행하였다. 박현채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1992, 소나무, p.311
광주항쟁을 광주사태로 규정하고 나아가 특정 정치인(김대중)의 지역감정에 편승한 음모와 사주에 의한 사건으로 매도하였다. 동시에 항쟁의 진실규명 요구에 대한 철저한 탄압은 일관적으로 자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의 은폐, 왜곡과 진상규명 요구의 탄압은 크게 두 가지 지역 주의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하나는 신군부의 언론통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광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부터 쌓여오던 전라도 지방에 대한 지역적 편견을 ‘광주’의 충격만큼 강렬하게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신군부와 관련한 정치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인식의 지역적 편차가 두드러지게 되었고, 1987년 정치권력의 재생산에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하나의 지역 주의적 문제는 계속되는 탄압과 치열하게 진행되는 진상규명 움직임이 광주에 대해 '신비함‘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지역적 특성과 관계없이 진보진영에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 또한 ’광주‘를 특별한 존재와 의미로 규정함으로써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정한 환상을 가지게 하여 오히려 ’광주‘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것은 광주민중항쟁을 계급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하고 계승함으로써 분화하는 사회운동진영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광주민중항쟁은 이러한 이중적 지역적 편견이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결국 1987년 6월항쟁을 이끌었으며, 서서히 그 진상도 밝혀져 갔다. ‘광주청문회’가 열리고 ‘광주보상법’ 등이 마련되었고 ‘광주사태’도 ‘민주화운동’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5공화국 시기 강화된 호남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한국지역감정의 구조를 ‘호남 대 비호남’의 구조로 가져갔으며 호남을 고립화시키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6월 항쟁이 실질적으로 지배구도를 바꾸는 변혁적 성과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호남에 대한 차별은 존재했으며, 한국의 정장은 모두 지역당으로 되었고 정치 또한 지역 패권주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계속해서 호남지역 주민들은 한편으로는 지역적 고립과 정치적 무력감,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이중적 차별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정근식「광주민중항쟁과 지역문제」,김종철 외『지역감정연구』,1991, 학민사
본질적으로 지배, 피지배 구도의 지역주의적 중첩 현상이 재생산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매우 진보적인 성격을 담지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남지역 중심으로 결집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지역감정 유용과 반동적 정치행태는 우리 사회에 지배모순의 지역 주의적 골이 상당히 깊게 작용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4.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광주민중항쟁은 본질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한국 사회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불균등 발전의 본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거질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역사적 맥락성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불행이도 광주전남 지역이 역사적으로 수탈의 피해 지역이었기에 한국 현대사의 자본주의 모순이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었던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지역적 모순의 본질을 재차 강조했던 것은, 현재 호남 대 비호남의 구도로 이용되는 지역주의의 구조적인 본질을 제대로 보아야 오히려 지역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공정한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론에서도 밝혔지만 지역주의 문제로 광주 항쟁을 보는 것은 매우 민감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만큼 지역감정과 혼용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항쟁을 폄하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사실 광주는 자본주의 체제 모순과 한국사회의 지배피지배 모순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사회변혁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획기적인 전범이었다. 80년의 비극이 준 아픔만큼 87년의 항쟁의 불길이 컸다고 본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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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조사연구소,『국민이 보는 5.18:특별법 제정에서 사면까지』,1998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5.18 광주 민주화 운동 자료 총서』-제5권,7권,10권,11권,15권(199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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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학회,『지역문제 지역주의 -지역화』,1997
한국정치학회,『지역문제-지역주의-지역화』, 한국의회발전연구회 주최의 세미나 자료..1997
홍기훈,『지역주의와 한국정치』,백산 서당,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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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A.피터슨,『5.18 광주 사태』,풀빛,1995
동아일보사,『5공 평가 대토론』,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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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22
  • 저작시기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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