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명창론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판소리 유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 ‘제’가 포괄하는 작은범주
1). 더늠
2). 바디(=판)
3). 악조

2.신재효의 소리꾼이 갖출 조건

3. 명창이 되기 위한 필수코스

4.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명창

5. 19세기 ‘전기8명창’

6. 19세기 ‘후기명창’

7. 근대5명창

8. 여류명창

9. 마무리

본문내용

동편제 마지막 종장(宗匠), ?-?)
전남 나주 출생이며 장기로는 <적벽가>, <춘향가>,<적벽가> 中 ‘삼고초려’, ‘장판교 대전’, ‘화룡도’가 있다. 우아하고 정대한 소리를 가졌으며 더늠으로는 <적벽가> 中 ‘조조 군사의 사향가(思鄕歌)’가 있다. 박만순, 정춘풍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워 김봉문, 김정길, 박녹주, 조학진 등을 길러냈다.
9. 김채만 (金采萬, 광주판 서편제의 절창(絶唱), 1865-1911)
전남 화순군 능주 출생으로 장기로는 <심청가>가 있다. 수리성에 양성이 낀 성음을 극단적인 서편제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더늠으로는 <심청가> 中 ‘심봉사를 소개하는 대목’이있다. 이날치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워 박화섭 김정문, 박동실, 박종원, 공창식 등을 길러냈다.
8. 여류명창
원래 판소리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고종 초에 접어들면서 신재효의 문하에서 최초의 여루명창 진채선(陣彩仙, 1847~?) 배출되었고 이어서 진채선과 쌍벽을 이루었던 허금파가 등장했으며 그 뒤, 강소춘, 강소향, 김녹주, 이화중선, 김초향, 배설향, 박녹주, 김여란, 김소희, 박초월 등이 큰 인기를 얻게 됨으로서 오늘날 여자 명창들이 더 많이 활동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진채선
김세종과 신재효의 지도를 받아 풍류, 가곡(歌曲),무용에도 능했고 특히 판소리를 잘불렀는데 미려하고면서도 웅장한 성음과 다양한 기량으로 남자명창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한다. 대원군의 총애로 명성과 영화를 누리고 후에 대원군이 실권(失權)하자 김제로 내려가서 창을 그만 두고 근신하였으며, 1898년 대원군이 타계하자 3년 상복을 입은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편, 채선의 추천으로 대원은 신재효에게 정 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내렸다.
2. 이화중선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의 몹시 가난한 농부 진압에서 태어나서 전북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홈실 마을의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다. 평범한 시골 아낙네의 처지에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던 이화중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은 하나의 사건이 홈실 마을에서 벌어지게 된다. 1918년 어느 날 송만갑이 이끄는 창극공연단 협률사가 시골 구석인 홈실 마을까지 찾아든 것이다. 몸과 마음이 온통 창극에 빠져들었고 자신이 무대 위에 올라가소리하는 환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던 이화중선은 마침내 남편도 집안도 체념도 벗어던지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집을 뛰쳐나온다. 그 당시 남원의 장득주에게 소리를 배우기 위해 동생인 장혁주와 결혼, 장득주에게 판소리의 기초를 터득한 이화중선은 장득주로부터 더 배울 것 이 없다고 판단되자 장혁주와도 이혼한다. 이화중선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결혼이나 가정 따위를 헌신짝처럼 여기며 오로지 소리를 위해서만 인생을 설계했던 것이다. 또 이화중선은 소리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판단하고는 어떤 부자의 첩으로 들어가 5백 석의 재산을 따로 얻어내는 데 성공, 부자 모씨와도 관계를 끊고 바로 서울에 올라왔다. 상경한 이화중선은 기생으로 변신하여 장안의 내로라하는 한량들을 소리 한마디로 녹여버린 일화도 유명하다. 후에 대동가극단에 들어가 판소리와 창극을 계속한다. 1943년 대동가극단이 일본으로 건너가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일본의 한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레코드를 취입하게 되었고, 100여장이 넘는, <춘향가> 中 ‘이별가’, <심청가> 中
‘추월만정’과 ‘선인 따라’, 그리고 남도민요 ‘육자배기’ 등은 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더 음반이었다. 이화중선은 일본의 각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과 일본인 노무자를 위한 순회 위무공연에 나서고 돌아오는 길에서 배에서 자살했다.
9. 마무리
판소리는 천민인 광대가 부르고, 그 내용은 평범한 인물들의 애환을 다룬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그 성격을 민중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판소리를 민요처럼 아무나 쉽게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판소리 창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년에 걸쳐 교육을 받고 또 지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한다. 청중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고도의 음악적 기량과 배우로서의 능력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소리는 민중적이면서도 고도의 전문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는 상 하층이 두루 즐긴 민족예술로 성장했던 배경에는 이러한 창자들의 고통스런 수련이 있었던 것이다. 판소리가 민족예술로 성장하는 데에는 이러한 요인도 있었으나 다양한 공연 방식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그 향유층을 확대해 온 것도 주요한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판소리는 사회 풍속의 차원에서 그 기반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위상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판소리는 19세기나 20세기 초기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신파극과 영화를 비롯한 새로운 대중예술들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면서 판소리는 침제를 면치 못하게 되었고,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판소리가 화석화한 것은 아니며, 판소리를 지키고 부흥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여러 명창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소수이긴 하나 판소리를 애호하는 청중들에 의해 명백이 유지되면서 새로운 활로를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판소리가 옛날의 영광의 되찾기 위해서는 판소리가 다양한 공연 방식을 개척해 온 것을 참고하여 오늘날의 청중들의 관심을 끌거나 청중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공연 방식을 다양하게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한국 구비문학의 이해, 유영대외, 2002, 월인
명창을 알면 판소리가 보인다, 국립민속국악원, 2000, 국립민속국악원
동편제에서 서편제까지, 오중석, 1994, 삼진기획
다시보는 판소리, 백대웅, 1996, 어울림
한국의 판소리문화, 국제문화재단편, 2003, 박이정
*목 차
1.판소리 유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 ‘제’가 포괄하는 작은범주
1). 더늠
2). 바디(=판)
3). 악조
2.신재효의 소리꾼이 갖출 조건
3. 명창이 되기 위한 필수코스
4.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명창
5. 19세기 ‘전기8명창’
6. 19세기 ‘후기명창’
7. 근대5명창
8. 여류명창
9. 마무리
*참고문헌
  • 가격1,5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7.10.03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3012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