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복식의 시대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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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민족문화 형성기의 복식 - 삼국시대

Ⅲ. 또 하나의 역사 - 가야, 발해

Ⅳ. 민족문화 도약기의 복식 - 고려시대

Ⅴ. 민족문화 결집기 - 조선시대

Ⅵ. 마치며

본문내용

비율은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조선 후기로 올수록 치마의 비율이 더욱 커지고 주름도 풍성하게 변해가는 양상을 보인다. 철릭은 유사시 융복으로도 불편함이 없도록 소매 한쪽에는 단추를 달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기능성도 갖춘 포제이다.
답호는 포 위에 입던 소매없는 옷으로서 명으로부터 사여받은 왕의 상복 속에 포함되어 있다. 포 위에 경쾌하게 입는 옷이기 때문에 쾌자라고도 하였으며, 군인들이 전시에 많이 입어 전복이라고도 한다.
심의는 중국 조사복인 현단에서 나온 것으로 상하가 연결된 상의하상식의 포이다. 주자가례를 그대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에는 유학자 간에 심의가 숭상되어 입혀졌고, 사례의식을 행할 때 예복으로 사용되었으며 수의로도 사용되었다. 심의의 소매는 넓고 깃, 도련, 수구에는 검은 선을 대었다. 허리에는 대를 맸으며 심의를 입을 때는 복건이나 정자관 등을 쓴다.
도포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서 생긴 포로 깃은 직령으로 되어 있으며, 뒤에는 뒷트임이 있고 전삼이 붙어 있다. 도포에 전삼을 대고 뒷중심을 절개한 것은 트임으로 속옷이 노출되는 것이 예의상, 미관상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도포는 사대부의 연복 및 제복으로 입혀졌다.
창의에는 대창의, 소창의가 있는데 대창의는 소매가 넓고 옆이 터진 포이며, 소창의는 소매가 좁고 옆이 터진 것을 말한다. 소창의는 창옷이라고도 하여 양반층에서는 표포 속에 입는 속옷으로 입었으나 평민들은 저고리 위헤 겉옷으로 착용하였다.
주의 즉, 두루마기란 두루막혔다는 뜻으로 조선후기 영조대에 처음으로 기록이 보인다. 조선후기 사서인들이 평상복으로 착용하였으며, 창의와 비슷하나 소매를 좁게하고 양옆에 무를 달아 손을 넣을 수 있는 옆트기만 남기고 나머지를 막았다. 주의는 도포의 속옷으로 입기도 하고 상민들의 웃옷으로도 입었는데, 고종 21년 5월 갑신의제개혁에서 양반들도 입는 포가 되었다. 유송옥 이은영 황선진(공저). 『복식 문화』(서울 : 교문사. 1996) p.52-56
ⅲ. 서민의 복식
조선시대는 신분제도가 엄격하여 이 시대 복식은 상하존비의 사회적, 신분적 질서를 대변하는 표식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 서민들의 복식은 양반의 복식에 비해 제약을 받았다.
조선시대 서민들에게 허용된 복식은 예부터 입어 내려오던 우리나라 고유의 복식으로, 그 기본 구조가 되는 바지, 저고리였다. 포로는 창옷, 철릭, 주의 등을 입었으며 여기에다 립모로는 패랭이를 썼고 버선을 신었으며, 신은 주로 짚신, 미투리를 신었다. 위의 책 p.56
ⅳ. 여자들의 복식
유교의 삼강오륜에 나타난 남존여비사상은 조선사회에 뿌리박혀 조선시대 여성의 사회활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내외법이 엄하여 여성의 외출시 얼굴을 가리게 하여 너울, 쓰개치마, 장옷, 천의 등의 쓰개가 매우 발달하였다.
여성의 복식에서도 신분별로 차이가 있었는데 궁중 및 반가에서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여성의 복식이 정해졌다. 조선시대 여성복식은 중국에서 유래된 예복과 국속의 치마, 저고리로 된 평상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예복은 궁중을 중심으로 입혀졌고, 일반 반가 여인이나 서민 여성 그리고 천민층의 여성은 우리 고유의 치마, 저고리가 기본이었다.
양반계급의 여성들은 남편의 관직에 따라 그의 신분에 맞는 복식을 착용하였으며, 관직을 갖지 않은 반가 부녀자의 복식도 어느 면에 있어서는 격차가 있었으나 평상복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예복으로는 원삼, 활옷, 당의를 입었으며 치마에 수식을 가하여 스란치마를 착용하였고 그 안에 무지기, 대슘치마를 입었다. 일반 반가 여인들과 서민 여성들의 평상복은 모두 고유의 저고리와 치마이며 서민 여성들의 복식에서 황, 자, 홍색은 제한되었고 직물도 비단류는 금지되어 저, 마포, 목면만이 허용되었다.
서민 여복은 반가 여복과 비교하면 옷의 종류 뿐 아니라 착의법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삼회장 저고리는 입지 못하고 특히 노동을 담당하는 천민 여성들은 활동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 치맛자락을 바짝 치켜 여며 입어 속옷이 밖에 드러나 보였다. 두루마기의 경우도 역시 폭이 좁고 길이도 짧은 것을 입어 신분이 구별되게 했다. 그러나 혼례 때만은 인륜지대사라 하여 반가에서와 다름없는 화관, 활옷, 족두리, 원삼 등의 착용이 허용되었다.
신분상 천인이였지만 특수계층이라 할 수 있는 무녀와 기생의 복식은 나름대로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먼저 무녀가 굿을 할 때에는 무인들의 융복인 철릭에 남전대를 매거나 동다리인 협수포 위에 전복을 입고 남전대를 매기도 했다. 그리고 양손에는 굿의 종류에 따라 칼이나 부채, 방울을 들었다. 두식으로는 공작의 깃이나 붉은 삭모와 패영이 달린 주립을 주로 착용하였다.
기생의 저고리 소매는 착수로 배래의 곡선이 거의 없이 팔에 꼭 끼어 신체의 윤곽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치마는 홑치마로 오른쪽으로 여며 반가 여인들과 구분이 되었으며, 치마 속에 부피감이 큰 무지기치마와 속바지를 입어 하반신을 부풀렸다. 외출 시에는 전모나 가니마를 쓰고 말을 타기도 하였다. 위의 책 p.57-60
Ⅵ. 마치며
이제까지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복식문화를 알아보았다. 삼국시대의 복식은 국가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계층화된 신분 제도로 귀족복과 서민복으로 구분되었고, 귀족들의 복식은 그들의 권력과 부를 복식을 통해 과시함으로써 호화로운 형태로 변모해 갔다. 반면에 서민들의 복식은 앞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이 고유복의 기본 형태에서 세부적인 변화만 있을 뿐이었다. 고려시대의 복식은 고구려의 부흥이란 건국 정신에 맞게 해외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였고 외국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하였으며 외국인들의 귀화도 받아들여 문화가 다채로웠던 만큼 다채로운 형태의 복식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국가 이념이었던 의례와 절차를 중시한 유교 정신은 복식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의례복과 평상복의 구분이 우리나라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분명하였다. 또한 유교적 미의식이 확립되어 과장과 허세를 피하고 소박한 성격의 문화가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이러한 자연주의적 성격이 복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규태 1991 한국인의 생활구조-1 한국인의 옷 이야기 기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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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14
  • 저작시기2007.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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