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주의와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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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민족주의와 민족통일

2.결론: 참학문․우리학문에 대해

본문내용

인이 믿고 따를만한 신뢰의 정치 지
도력을 발휘하였다. 여기에는 철학이 있고 과묵하면서도 실천하는 원칙이 있으며 그를
추진할 수 있는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 우리에겐 동서 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한국 민족주의를 제대로 아는 정
치인도 정당도 없다.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이데올로기 시대는 끝났다는 말과 함께 앞
으로는 시장원리가 전세계를 지배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거론하는 추세 속에,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세계화와 민족주의 시대에 오히려 우리는 오늘 이념공백
상태에 놓여 한국 민족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이
한국사를 왜곡하고 신사참배를 하며 그리고 군국주의적 자위대의 깃발을 끌어올리는
모습 앞에 한국의 여야 정당은 이념투쟁과 권력싸움만 일삼는다면 우리의 앞날은 불을
보듯 하는 것이다. 백범은 왜병을 몰아내기 위한 동학혁명의 2차 봉기 때 직접 해주 접
주로서 가담한 것이 약관의 시절이었다. 동학의 접주 중에서도 가장 어려 꼬마 접주라는
별칭까지 갖게 된 한국 민족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백범은 일찍이 한학을 익혀 동학에 입도하면서 새로운 인생관에 눈을 떴다고 한다. 동학
2차 봉기의 실패로부터 백범의 조국애는 뼈에 사무치도록 불타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청
년 김구는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으려는 의지와 열정으로 만고풍상의 파란의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학의 영도자 해월 최시형을 스승으로 녹두장군 전봉준과 의암 손병희를 선배로 직접
2차 봉기에 참여했던 해주의 접주 김구는 스승과 선배를 모두 잃은 훗날 그 뒤를 이어
상해 임정을 이끌어 동학혁명정신을 계승해 갔다. 임시정부의 정치노선은 조소앙에 의한
三均主義였지만 이의 뿌리는 동학에 기인하는 것으로 소위 한국판 三民主義였다. 또 백범
은 해방된 조국에서는 국교를 동학(천도교)으로 할 것을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우리는 한국 민족주의의 자주노선이 민족의 평화통일의 법통임을 알 수 있다. 따
라서 한국 민족주의의 자주노선이 더욱 더 구체적으로 확립되고 철학적, 현실 정치적으로
완성을 이루어 참학문, 우리 학문의 모델(paradigm)을 개발하여 민족의 평화통일과 평화
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나갈 것을 기대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동아시아 모델연구를 위하여 아울러 우리는 민족통일학회를 창립하게 되었음
을 오늘 내외에 밝혀두게 된다.
강호제현의 부단한 지도편달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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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20
  • 저작시기2007.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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