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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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울의 젖줄 청계천의 중심 다리

‣현존하는 수표와 수표교

‣세종대왕 때 처음 창안된 측우기와 수표

‣치수(治水)는 제왕의 책무

‣조선 후기의 치수는 실용적인 준천 사업 중심

본문내용

적, 사회적 배경을 떠나서 과학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명제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세종 때의 수표, 중국의 수칙, 영조 때의 수표는 각각 그 역사적 의의와 사회적 기능이 달랐던 것이다.
치수(治水)는 제왕의 책무
중국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세제왕이 있다. 바로 요(堯)와 순(舜)과 우(禹)이다. 춘추시대 이전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유가의 경전인 『서경』에 따르면, 요임금은 ‘희화씨’라는 천문 관측 관원과 기관을 설치했고, 순임금은 ‘선기옥형’(또는 혼천의)이라는 이상적인 천문 관측기구를 창안함으로써 완벽한 천문 역법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각을 알려 주어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의 책무를 다했다. 이에 비해 우임금은 잦은 홍수로 황폐해진 중윈 지역을 물길을 트는 방식으로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천하를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해 성군이 되었다. 결국 중국의 전설적인 세 성군 요와 순과 우는 천문 역법과 치수를 완성함으로써 제왕으로서 책무를 다하고 권위를 확보한 모범적인 제왕이었던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15세기 전반의 시기는 새로운 국가 제도를 이상적으로 정비하고, 아울러 왕권의 권위를 드높여 안정적인 권력을 확보해야 했던 시대적 당위와 필요가 절실하던 때였다. 세종 떼에 쌓은 천문 역산 분야의 눈부신 위업이 요임금과 순임금의 위업을 따른 것이라면, 측우기와 수표를 통한 강우량 측정 제도의 정비는 우임금의 위업을 따른 것이었다.
한경지도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청계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청계천은 서울에 내린 빗물을 배출하는 출구였을 뿐 아니라 장안에서 나온 하수를 배출하는 주요 통로로서, 건국 후에 새로이 세워진 계획 신도시 서울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젖줄이었다. 지도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1770년 제작)
청계천은 수도 서울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젖줄이었다. 백악산과 남산 등 사방에서 흘러내린 작은 하천들이 청계천으로 모여 한강으로 이어졌다. 서울 도성 안에 내린 빗물은 작은 지류를 통해 청계천으로 모여 한강으로 배출되었다. 우임금을 본보기로 성군의 정치를 펼치려 했던 세종은 서울에 내린 빗물의 양을 측우기로 빠짐없이 측정하고, 빗물이 모여 빠져나가는 청계천의 수위를 수표를 이용해 정확히 측정하는 제도를 정비했던 것이다.
15세기 조선인들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그 많고 적음은 하늘이 하는 일이었다. 즉 가뭄과 장마는 궁극적으로 하늘이 정하는 것으로서,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왕이 제왕으로서 책무를 다하면 하늘은 적정한 비를 내려줄 것이고, 책무를 다하지 못하면 가뭄과 장마를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것은 하늘이 제왕에게 내리는 일종의 경고로 이해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기우제와 기청제는 왕이 정치의 잘잘못을 반성하면서 하늘에 기원을 드리는 제사였던 것이다. 측우기와 수표를 이용해 강우량과 하천 수위를 측정한 것은 세종이 하늘의 경고에 성실하게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였다. 2mm 단위로 지나칠 만큼 정밀하게 청계천의 수위를 헤아리고자 한 것도 이 대목에 이르면 이해가 된다.
조선 후기의 치수는 실용적인 준천 사업 중심
세종 때에 확립된 강우량과 하천 수위의 측정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치수의 전통은 조선시대를 통해서 줄곧 계승, 지속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필요성은 조선 후기에 오면 많이 변하다. 즉 그동안 서울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이 변하면서 치수의 핵심 내용도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준천시사열무도
영조 36년(1760)에 이루어진 청계천의 준천 작업을 영조가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 위에서 시찰하면서 독료하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규장각에 소장된 <준천시사열무도>(1760)의 첫 번째 그림이다.
조선 초 이래 10만에 불과하던 서울의 인구는 18세기에 들어오면서 급격히 증가해 무려20만에 육박할 정도로 수직 상승했다. 인구가 증가하자 그만큼 서울 장안의 하수 배출량도 증가했다. 또한 정부에서 엄격히 금했음에도 서울을 둘러싼 산들이 불법적으로 대거 개발되면서 큰 비가 내리면 빗물이 걷잡을 수 없이 청계천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시에 산에서 흘러내리는 토사가 그대로 청계천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시에 산에서 흘러내리는 토사가 그대로 청계천에 유입되어 하천 바닥을 높여 놓았다. 이러한 토사의 유입과 하천 바닥의 상승은 도심을 흐르는 청계천의 젖줄 기능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영조 때의 기록에 따르면, 청계천에 쌓인 토사로 하천 바닥이 청계천변의 도로만큼 높아졌다고 한다. 청계천의상태가 이 정도라면, 작은 비에도 범람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지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영조36년(1760년)에 청계천의 대대적인 준천 사업이 벌어지게 된다. 무려 57일 간에 걸쳐 연 인력 20만여 명을 동원해 시행한 어마어마한 사업이었다. 1760년의 대대적인 준천 사업은 수표와 수표교를 중심으로 서울의 치수 통제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영조는 수표교의 교각 밑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네 글자를 새기고 이후 준천 사업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수표교 교각에 새긴 ‘경진지평’이라는 글자가 토사로 가려지지 않도록 치수 사업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또 영조는 ‘준천사’라는 기관을 수표교 옆에 설립해 청계천의 수위를 철저히 점검하면서 서울의 치수 통제 시스템을 관리하도록 했다.
경진지평
교각 밑에 세운 이 비석의 글씨가 토사로 가려지면 준천 사업을 하라는 영조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영조 때의 이러한 정책은 1770년의 측우기와 수표 제도의 부활로 이어졌다. 그러나 측우기와 수표가 지닌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기능은 세종 때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지나칠 정도로 정밀하게 2mm 단위까지 하천 수의를 측정함으로써 성군의 책무를 성실히 실천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려던 세종 때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매우 줄어들었다. 그 대신 영조 때에는 비록 21cm 정도의단위로 수위를 측정하도록 했지만 도성의 젖줄인 청계천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기준으로서 실용적인 면에 더 큰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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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22
  • 저작시기2007.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8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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