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의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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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II. 본론
1. 금석문이란?
(1) 뜻
(2) 종류
(3) 신라금석문의 특징
2. 신라 금석문의 검토
(1) 영일 냉수리 신라비
(2) 울진 봉평 신라비
(3) 울산 천전리 서석명문
(4) 영천 청제비
(5) 단양 적성비
(6) 명활산성작성비
(7) 안압지출토비
(8) 진흥왕 순수비
(9) 대구 무술 오작비
(10) 남산신성비
(11) 임신서기석

III. 결론

본문내용

산 주변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小石碑群을 총칭하는 말이다. 현재 9개가 발견되었다. 화강암으로, 가장 큰 것은 높이 약 121㎝, 폭 47㎝, 두께 약 10㎝이다. 각 비문은 똑같은 형식으로, 앞으로도 같은 모양의 비가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문에는 조선시대의 한자차자법인 이두(吏讀)가 섞여 있으며 순수한 한문은 아니다.
② 新城碑의 檢討
진평왕 13년(591)에 남산에 石築의 산성을 새로 구축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남산신성비에는 예외 없이 처음에 공통적으로 ‘辛亥年二月二十六日南山新城碑作節如法以作後三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비문에 의하면 공사는 辛亥年 2월 26일 전국의 촌락마다 匠尺文尺石捉人 등 기술자와 인부를 징발해서남산신성을 만들고 이때에 법과 같이, 만든 후 3년 안에 붕괴되면 담당집단이 벌받을 것을 공사 전에 맹세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南山新城’이라는 표현이다. 비의 내용과는 달리 기존의 문헌사료에는 남산성이라 표기되어있다. 따라서 ‘新城’이 있으면 ‘舊城’도 있을 법하다. 즉 남산성과 남산신성은 동일한 곳이 아니라 장소를 달리하며 舊城은 곧 남산토성이라 할 수 있다. 기존에 성이 있는데 새로운 성을 쌓게 된 경위에 대해 살펴보면 진평왕의 즉위과정을 통해 알 수 있을 듯하다. 진평왕은 진지왕의 폐위 후 정치적 혼란 속에 왕위에 올랐다. 진평왕은 왕권안정을 위하여 대대적인 중앙행정 관부나 관직을 신설하는 등 관료조직을 강화하였고, 建福이란 새 연호를 쓰기까지에 이른다. 이렇게 제도적인 정비를 함으로 국왕 중심의 권력집권화를 이루려고 하였고 이에 따라 남산신성 축조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즉, ‘新城’이라 이름한 것도 진평왕대에 진행된 개혁의 한 부분으로 새로운 시대의 성립을 선포하고, 새로워진 지배체제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 하에 전국에 걸쳐 民을 역역동원하여 법에 맹세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출범하는 진평왕적 지배체제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하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남산신성의 축조에는 단순히 防禦山城 축조 이상의 큰 역사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1) 壬申誓記石
① 槪觀
1934년 경상북도 경주시 견곡면 석장사 부근에서 발견된 자연석으로 길이 32㎝, 너비 12.5㎝, 두께 2㎝이다. 아래쪽으로 좁아지는 모양으로 5행 74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비석 첫머리에 壬申이라는 간지와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글자는 모두 알아 볼 수 있으며,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고 우리말의 어순에 따라 배열한 것이 주목된다. 비문의 건립연대는 임신년이라는 간지는 신라 때 국학이 체제를 갖춘 뒤인 성덕왕 31년(732)이거나 화랑도가 융성하였던 시기인 진흥왕 13년(552) 또는 진평왕 34년(612)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② 壬申誓記石의 檢討
"壬申年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서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忠道를 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맹서)을 잃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할 것을 받아들임을 맹서한다. 또 따로이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서하였다. 詩尙書禮記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서하되 3년으로 하였다."
위와 같은 내용의 이 비문은 신라융성기에 청소년들의 유교도덕사상과 신라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임신년 6월 신라인 두 화랑이 3년 동안에 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서하고 나서, 다시 <시경>, <상서>, <서경>, <예기>, <좌전> 등의 유교경전 공부도 3년 동안에 할 것을 맹서하고 있다. 3년 동안의 맹서는 남산신성비의 서두에도 나온다. 어떤 집단에서 담당했던 남산신성의 부분이 3년 안에 붕괴가 되면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의 맹서가 적혀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학문 연마, 각종 공사를 3년에 책임을 진다고 하늘에 대한 맹서는 신라 사회가 성실한 삶을 영위했음을 짐작케 하며, 이러한 책임성이 있는 사회 분위기는 나아가서 삼국 통일에도 일조를 담당했다고 사료된다.
III. 결론
이상으로 신라 금석문에 대해 그 내용과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알아보았다. 냉수리비를 통해 6部 체제와 葛文王의 성격에 대해 알 수가 있었고, 봉평비를 통해서는 국왕의 지위 변화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때 국왕은 上大等을 설치하기 이전에는 귀족회의 의장으로서 귀족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는데, 上大等의 설치 후 국왕권이 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적성비를 통해서는 당시의 지방통치제도, 관등제도, 新영토의 지배방식 뿐만이 아니라, 신라의 율령제도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위의 비문들이 6세기 신라시대의 정치에 관한 것이라면 역역체제에 대해서는 청제비, 작성비, 안압지출토비, 신성비 등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역역체제에 있어서는 주로 지방관을 통하여 국가의 명령을 전달받고 인력동원과 축성공사를 한 것이다.
이 외에도 순수비를 통해 진흥왕이 민심을 수습하고 영역을 확인함으로 새로운 영토에까지 왕의 권력을 펼침으로 왕권신장을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임신서기석을 통해서는 화랑도들의 충, 효 사상과 유교정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금석문은 빈약한 고대사의 자료에 활력소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새로운 금석문의 출현으로 역사의 내용이 입증되기도 하지만 새롭게 많이 바뀌기도 한다. 아직까지 논란중인 부분도 많은데 따라서 우리는 1차 사료인 금석문을 기존 문헌들과 비교를 통해 좀더 연구를 함으로 올바른 역사 입증에 힘써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주보돈, 금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2002
趙東元, 新羅 中古 金石文 硏究, 國史館論叢 42집 pp.67~93, 1993
朱甫暾, 6세기 초 新羅王權의 位相과 官等制의 成立, 歷史敎育論集 13, 14집 pp.245~270, 1999
金昌鎬, 古新羅 金石文의 연구 성과와 그 과제,《新羅金石文의 現況과 課題》,2002
朱甫暾, 6세기 新羅金石文과 그 특징,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23집 pp.121~15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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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22
  • 저작시기2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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