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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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급과 마찬가지로 자기 의견을 직접 표현하고 투표권을 갖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세력이었으며 이에 여러 중간 계급 개혁가들도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중간 계급 비국교도들은 노동계급의 지도자들과 함께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하원과 새로운 개혁 입법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개혁 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1860년대 영국의 정치가들은 이들을 무조건 억누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원의 보수당 지도자이자 나중에 수상이 된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1867년에 개혁 입법을 시행했는데 그것은 도시에서 연간 10파운드 또는 그 이상의 구빈세나 집세를 내는 모든 남성과 시골에서 12파운드 또는 그 이상의 지대를 지불하는 차지인에게 까지 투표권을 확대함으로써 선거 인구수를 배가하는 것이었다.
1867년 개혁 입법안의 통과 이후 10여 년의 세월은 영국 자유주의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모든 사람의 초등교육을 보장하는 교육법과 노동 조합의 합법화와 대도시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다.
20. 신자유주의
영국은 제 3차 선거법 개정 이후 정치적 법률적 평등과 언론의 자유를 선두로 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요구가 실질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는 거 원리들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나 정당활동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자유주의는 이제 더 할 일이 없단 말인가. 적어도 영국의 자유주의의 경우에는 그렇다. 홉하우스는 1910년에 19세기 말엽의 영국 자유주의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19세기는 자유주의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오면 그 위대한 운동도 이제 아주 쇠퇴하여 자기 주장에 대한 확신이 식어가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이제 제 할 일을 다 한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화석화되어 가고 있는 신조처럼 그저 모양만 남아 있는 꼴이었다.” 홉하우스 등의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다 쇠퇴해 버린 그 위대한 자유주의 운동의 무엇을 다시 일으켰던가.
19세기 말엽의 영국 정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개인의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자유주의의 본질상 결코 외면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고하고 19세기의 자유주의는 개인적 자유, 경제적 자유 및 정치적 자유 등의 수립에 주력하고 국민생활의 질적 향상을 등한시해왔다. 등한시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자유주의의 당연한 태도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원리의 근본에 비추어볼 때 어느 한 개인이라도 그 천부의 권리를 실현할 수단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그 권리를 실현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자유주의는 그것을 실현시켜 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여기서 19세기 말엽의 자유주의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자유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낡고도 새삼스런 문제이고, 또 하나는 국가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19세기는 개인생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국가의 기능을 가급적 줄이려는 자유주의가 승리하는 세기인데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국민의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여러 면에 대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그러한 규제와 간섭의 입법들이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부에 의해 제정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늘어 가는 국가간섭의 현실에 매우 불안하였다.
이처럼 자유의 개념과 국가의 기능을 고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일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서 자유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첫 인물이 그린이다. 그린은 개인이 첫째고 사회는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종래의 자유주의의 실체론을 부정하고 보다 적극적인 사회관과 국가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또 개인의 천부의 권리를 본래부터 갖고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권리는 사회에서 취득한 것이고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린의 자유의 개념은 세 가지 점에서 종래의 자유의 개념과 다르다. 첫째는 제약이 없는 상태를 자유로 보는 소극적 개념에서 적극적으로 행하는 힘 내지 능력을 자유로 보았다. 둘째는 그의 자유에는 도덕적 요소가 들어 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능력과 기회를 가져야 할 때 그 어떤 일은 반드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야 한다. 셋째 그의 자유의 개념에는 평등주의적 요소가 아주 명확히 들어 있다. 인간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다 똑같이 자기 자신들을 가장 훌륭하게 만드는 힘을 가져야 하고, 그 힘이 국가를 통해 증대될 때 부자들의 자유가 제약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 제약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자기들의 참 자유를 증대시킬 자격이 있다는 평등주의적 원칙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린은 자유주의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국가간섭을 정당화하고 그것이 개인주의의 원리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린의 새 자유주의는 허버트 새뮤얼과 홉하우스를 비롯한 여러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더욱 치밀하게 발전되어 갔다. 새뮤얼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인데 국가가 바로 잘 하기만 하면 국가의 도움으로 그 자유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말하였고, 홉하우스는 “자유의 적은 국가 이외에도 많다. 그런데 실은 우리가 그 적들과 싸워 오는 데는 국가의 힘을 빌어 온 것이 사실이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종래의 고전적 자유주의보다 더 넓은 의미의 자유의 개념에 따라 국가간섭과 사회개혁을 정당화하는 새 자유주의 이론은 드디어 자유당의 실제 정책에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자유당은 계속 정권을 담당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정권담당 기간에 행한 사회개혁의 주요한 내용을 골라보면 1906년의 노동자 배상법과 노동쟁의법을 시작으로 중소농 장려법, 노인연금법, 어린이 보호법, 광부 8시간 노동법, 주택 및 도시계획법, 최저임금법, 직업알선법, 국민보험법, 1913년의 노동조합법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정책에 필요한 재정은 주로 소득에 대한 누진세, 상속세, 지세 등 부유층의 부담으로 충당되었다. 이와 같은 자유당의 사회정책은 돌이켜보면 복지국가의 첫 단계를 획하는 대단히 뜻 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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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17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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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55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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