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생애와 대표작품 무정과 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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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작가
1. 연보
2. 생애
1) 고아
2) 동학
3) 1차 유학 :일진회의 유학생
4) 방랑
5) 민족개조론
6) 동우회

Ⅲ. 작품
1. 무정
1) 배경
2) 인물
3) 줄거리
4)‘무정’의 근대소설의 특징
5)‘무정’과 이광수
6)‘무정’의 한계
2. 2.8독립선언서
1) 배경
2) 2.28독립선언서와 기미독립선언서
3) 2.28독립선언서와 이광수
3. 흙
1) 배경
2) 인물
3) 줄거리
4)‘흙’과 이광수

Ⅳ. 이광수의 친일

Ⅴ.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다. 한민교 선생과 심례가 살여울로 떠나려고 경성역에 나가자 사오십명이 환송을 나왔고 거기서 한선생은 농부의 차림으로 김갑진을 만나게 된다. 김갑진은 검불랑에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하며 명년 쯤 한번 와 달라고 한선생에게 부탁한다.
4) 「흙」과 이광수
허숭은 고학(가정교사)으로 전문학교 법과를 나와 변호사가 된다.
→식민지 시대의 변호사란 물을 것도 없이 식민지 정책을 긍정한 위에서 이룩된 직업이다. 이런 총독부의 합법적 통치 기구의 나사못에 해당되는 변호사 허숭은 그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법치주의의 울타리를 전제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색하고 고민하는 일이 동우회의 근본 사상이다. 춘원은 법치주의의 테두리 속에서, 그 법치주의가 승인하고 만들어낸 가장 높은 수준의 조직물인 변호사 허숭을 내세워, 동우회의 합법적 운동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동시에 보이고자 한 것이다.
5) 브나로드 운동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 계몽운동의 하나이다.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 퇴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을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하여 제4회에 '계몽운동'으로 개칭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금지로 1935년부터는 계속하지 못하였다. 본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 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라는 뜻의 러시아 말의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에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에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부터 이 말이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동아일보사는 명칭만을 빌려 쓴 것이라고 뒤에 밝혔다.
'브나로드'로 애칭되던 당시 청년 학생 계몽 운동의 배경과 역사는 민족 독립 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계몽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서울의 학생과 지식 청년, 문화 단체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에 의해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유학생이 방학 때에 실시한 귀향 계몽운동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천도교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에서는 1926년 여름방학에 귀농운동(歸農運動)을 폈으니 이것도 학생에 의한 농촌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사회문화운동의 배경 하에 각 급 학교 학생은 학생 써클 조직을 이용하여 농촌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가령, 1926년에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은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고 그해부터 농민을 계몽하는 야학 운동을 전개하다가 1928년 9월에 경찰에 발각되어 좌절된 적이 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은 교외 활동으로 개학 중에는 수원 인근에 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며 문맹 퇴치운동을 계속하였고, 방학 중에는 전국에 퍼져있는 선배 졸업생들과 제휴하여 농촌 개발을 위한 여러 가지 계몽활동을 전개했는데, 이 운동을 상록수운동(常綠樹運動)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농촌계몽운동은 당시 어느 학교의 우리나라 학생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당시에 브나로드운동으로 애칭되던 청년 학생들의 민중 계몽운동은 민족 독립운동에 있어 민중 계몽을 통한 민족 자강으로 독립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한 운동으로서, 언론계와 조선어학회·청년 학생이 힘을 합쳐 거국적으로 전개하였던 주목할 만한 문화운동이었다.
Ⅳ. 이광수의 친일
이광수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 년간 복역 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조선의 학도여>는 학도병 지원을 선동하는 그의 대표적인 시이다.
이광수의 친일성향은 그가 문단을 개척하기 훨씬 이전의 시점에서도 발견되지만, 1922년의 <민족 개조론> 이후에는 그것이 좀 더 분명해진다. <민족 개조론>은 조선인 열등설(劣等說)을 전개하면서 폭력을 비폭력으로 유도하려는 총독부의 어용 노선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930∼40년대로 들어와서는 남들이 ‘이광수(李狂洙)’라고 빈축할 정도의 광적인 친일로 탈바꿈하게 된다. 조선 문인협회, 조선 문인 보국회의 수뇌로서 [황도학회(皇道學會)], [조선임전보국단(朝鮮 臨戰報國團)], [조선언론보국회], [대화동맹], [대의당]의 위원으로 참가하고, 대동아 문학자대회 대표로 두 차례 참석한다.
Ⅴ. 결론
앞서 우리는 이광수의 작품 외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문인이나 사상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상황이나, 정세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의 시기에는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에 관여한 것이 보인다. 이시기에는 즉각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실력양성이 중요하다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민족개조론」에 와서는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민족의 쇠퇴원인을 잘못된 민족성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만주사변(1930)을 거치면서 아시아 최강국으로서 일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이에 따라 이광수 내부에서는 일본의 힘이 강할수록 조선의 독립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현실론적 인식이 강화되었다. 그러면서도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을 일본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등장하지 않았다. 중일전쟁(1937)은 ‘조선=일본’이라는 등식이 전면화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중일전쟁 초기 단계에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광수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이광수는 애초에 서구와 서구화된 일본을 모범적인 근대 사회로 설정했다. 그리고 빠른 기간에 서구와 맞설 정도의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힘에 압도되어 일본화가 곧 조선이 근대화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했다. 이광수의 이러한 생각은 세계 질서의 변화를 가장 능동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가장 부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무정, 이광수 장편소설>, 이광수, 문학과 지성사, 2005
<이광수 소설의 비판과 옹호>, 한용환, 새미, 1994
<이광수와 그의 시대>, 김윤식, 솔, 1999
<춘원 이광수와 민족주의>, 곽준혁, 한국정치사상학회 논문, 200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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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0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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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56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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