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미술: 고구려 계승관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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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미술: 고구려 계승관계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시대 개관

3. 발해의 문화적 특징

4. 발해 미술
(1) 회화
(2) 조각
(3) 공예
(4) 건축

5. 맺음말

본문내용

로 제작된 각종 장신구, 그릇, 무기, 연모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금속과대는 정방형의 과들을 연결하여 띠를 이루게 되어 있는데, 과마다 푸른 옥을 감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황금의 과와 감입된 푸른 옥이 이루었을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단연 돋보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나. 토기와 도자기
발해의 토기는 그 양식에 따라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기에는 대부분 손으로 빚고 물레로 다듬어진 것으로, 종류나 크기, 모양, 색깔 등이 매우 다양하다. 이 중에서 고구려계는 입이 밖으로 벌어지고 배가 불룩한 형태를 띄고 있으며, 말갈계는 입술이 두 겹이고 몸이 긴 형태를 띄고 있다. 후반기의 토기양식은 중국 당대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변화했는데, 유약을 바른 백자, 청자, 녹유청자, 삼채도기 등이 등장하였다.
특히 발해의 자기는 같은 시대 여러 나라의 도자기 공예보다 독특하게 발전되었으며, 당에 수출하기도 했다.
다. 기와와 벽돌
불교융성의 영향으로 많은 절터에서 기와와 벽돌을 발견할 수 있는데,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이다. 특히 지붕을 장식했던 와당(막새기와)의 절대 다수는 연화문의 형태로, 고구려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짐승얼굴기와(怪獸面瓦)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한 눈, 크게 벌린 입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길게 내민 혀, 벌름거리는 코 등 사납고 험상궂은 짐승 얼굴을 형상화하였다. 여기에 짙푸른 녹색 유약까지 입혀져 더욱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다.
발해기와(渤海瓦當)는 수키와, 암키와, 막새기와, 치미 등 고대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는 모두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녹색의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가 사용된 것을 보면, 녹색으로 물들여진 발해 기와 지붕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연꽃무늬를 한 막새기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러한 모티브는 고구려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그 문양과 제작 기법에 있어 고구려 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았음을 말해준다.
발해의 막새기와는 부조가 뚜렷하고 힘이 있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는데, 다만 고구려 막새기와가 8개의 연꽃잎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서 발해 것은 6개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데에서 발해의 독자성이 엿보인다. 당시에 지붕에 기와를 이었던 건물은 궁전, 관청, 절이었다. 따라서 막새기와가 고구려적이었던 점은 지배층에 고구려 계층 사람들이 많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건축을 담당하였던 장인들이 고구려로부터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한편, 암키와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문양을 만들거나 갈대 대롱으로 찍어서 연주문을 만들고 그 양쪽을 따라서 빗살무늬를 넣는 방식은 발해의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4) 건축
가. 궁성
발해 성은 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처럼 초기에는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체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집안의 환도산성과 국내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구려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8세기 이후에는 당나라 식으로 전환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발해의 궁성은 나라의 크기나 위엄에 걸맞게 규모가 크고 웅장했으며, 짜임새 있는 궁궐과 외성과 내성으로 철저히 보호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상경 용천부를 들 수 있다. 당나라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떠 바둑판 모양으로 축조한 상경 용천부는 외성과 내성, 궁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동양에서는 장안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나. 절터
발해는 고구려의 불교를 계승하여 왕실과 귀족이 신봉하였으며, 문왕이 스스로 불교 성왕으로 칭하는 등 불교 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사원도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들 사원은 통치의 중심지였던 5경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불교가 지배자들의 신앙이었음을 보여준다.
발해 사찰의 대부분은 불에 타 없어졌으나, 상당수의 절터가 발굴되고 있다. 이들 사찰에는 탑, 금당, 강당, 회랑이 있었으며, 대부분 남북을 축으로 건축되었다. 금당은 장방형이나 정방형이 대부분이다. 상경의 제 6사지에는 마당의 북쪽과 동쪽 및 서쪽에 각각 금당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이것은 고구려의 3금당식 가람배치법이 계승되었음을 증명해주는 유적이다.
다. 무덤
발해의 무덤은 그 재료에 따라 크게 흙무덤, 돌무덤, 벽돌무덤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흙무덤은 발해 건국 이전부터 말갈족들이 만들었던 무덤양식이다. 돌무덤은 석실봉토묘로 발해무덤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으며 양식 면에서는 고구려 후기의 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석실봉토묘의 대표적인 예로는 정혜공주(738~777)의 무덤을 들 수 있다. 벽돌무덤은 당나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특히 정효공주(757~792) 무덤은 벽돌로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아가면서 천정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된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무덤 위에 탑을 쌓는 방식은 발해의 독특한 양식으로, 무덤위에 건물을 짓던 방식이 불교와 융합되면서 변모된 것이다. 고구려 장군총에서도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전통이 계승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승려가 아니라 일반인을 위해서 무덤 위에 탑을 쌓는 방식이라든지, 하나의 무덤에 여러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방식 1부 1처제를 바탕으로 부부합장이 기본이지만 여기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묻혀 있는 예가 많이 보인다.
은 발해만의 고유한 문화적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발해의 미술은 대체로 고구려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수용하여 그 나름의 미술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으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규명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용산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발해실이 마련되어 있다. 박물관 역사 6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발해실이 생겼으며, 국내에서는 발해를 연구하는 연구자도 손에 꼽힌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발해는 분명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역사임이 틀림없다. 중국이 발해마저도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역사, 발해에 대한 좀 더 많은 관심과 발해를 제대로 구현해내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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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4.24
  • 저작시기2007.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2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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