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식민지근대성][식민지역사][식민지][식민성][일제시대][일제강점기]식민사관의 개념, 식민사관의 내용과 식민지근대성의 이중적 의미 및 외국의 식민지 역사를 통해 본 식민사관 비판(식민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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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식민지근대성][식민지역사][식민지][식민성][일제시대][일제강점기]식민사관의 개념, 식민사관의 내용과 식민지근대성의 이중적 의미 및 외국의 식민지 역사를 통해 본 식민사관 비판(식민사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식민사관이란

Ⅲ. 식민사관의 내용
1. 타율성 이론
1) 만선사관
2) 반도적 성격론
3) 사대주의론
2. 정체성 이론

Ⅳ. 식민지 근대성의 이중적 의미

Ⅴ. 아시아 각국의 식민지 역사
1. 인도
2. 인도네시아
3. 베트남
3. 말레이시아

Ⅵ. 식민사관 비판
1. 반도적 성격론에 입각한 타율성 이론 비판
2. 정체성 이론 비판
3. 당파성론의 새로운 인식

참고문헌

본문내용

역사에 있어서 중세 봉건사회의를 인정하지 않고 외래 자본주의 세력이 침입하여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의 역사적 단계를 고대 사회적 단계로 규정한 것과는 달리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왕조후기까지를 아시아적 봉건사회로 설정함으로써 우리역사에서의 중세봉건사회의 위치를 확실히하여 식민사론의 중세 부재론에 대항하였다.
고려왕조의 성립을 ?신라 귀족에 대한 신흥 봉건적 세력의 성립, 종래의 구귀족군에 대한 정치적 승리로서 상호 보험적인 집권적 공전제를 확립한 것이다? 하여 같은 토지 국유제 아래서도 ?고대적 국유제?와 ?중세적 국유제?를 구분하려 했다. 이점은 후쿠다가 중 세 부재론을 펴면서 토지 공유제의 지속이 봉건사회 부재의 원인이라 했는데 대하여 이른바 토지 공유제를 인정하면서, 그 고대적 성격과 중세적 성격을 구분함으로써 봉건사회의 존재론을 주장한 것이다.
이청원의 이론 : 봉건적 생산 양식은 고대 사회의 말기에 이미 성립되어 공동체적 토지 소유에는 그 맹아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한 농노제 내지예농제는 아직 봉건적 토지 소유자가 정치 권력의 조직자로서 결정적으로 등장한 때를 가지고 그 성립을 획기로 한다? 하여 조선의 성립부터를 중세 사회로 보는 이론적 바탕을 제시했다. 그가 조선 사회를 중세 봉건 사회로 보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먼저 상공업면에 있어서는 ?고려 후기에 있어서 봉건 지주의 손에서 도망하여 자유롭게 된 농노들이 끊임없이 도시에 유입한다. 도시에 유입한 농노는 약간으 수도구 기타의 자본과 노동력이 유일한 제산이다. 계속해서 유입하는, 자유로왔던 농노에 대하여 여기에 일정한 수공업자(동시에 상인을 겸한다)의 동업 조합이 이루어진다. 이들이 봉건적 도제제도(길드)의 상업 및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했고, 다음 토지 문제에 있어서는 고려말의 사전개혁이 ?토지 그것에 대한 개혁이 아니라 농민의 주거와 이동을 영구히 일정한 토지에 예속한 것이다. 즉 이것은 거주지의 이동의 자유를 주지 않는 농노 제도의 하나의 특징인 것이다? 하여 사전법으로 중세 사회 성립의 중요한 계기로 보았다. 그는 또 조손 왕조 사회가 농업 노동과 수공업 노동과의 결합에 기초한 자연 경제 테제였으며, 그것이 봉건 사회 존립의 제 1의 조건이었다 하고, 최대의 토지 소유자인 국가의 봉건적 토지 소유와 그것의 농민에의 분배는 봉건 국가가 그 봉건적으로 소류되어 있는 토지에 결부되어 있는 농노전부의 개인적 경제에서 잉여 경제를 빨아들이고 또 그것을 스스로 점유하기 위한 물질적 기초를 그들에게 준 것이다 하였다.
우리를 포함한 아시아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정체성이론 - 그리고 이른바 아시아 국가의 정체현상이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고정되었고, 갖은 수탈로 자본주의 맹아마저 짓밟아버린 사실을 은폐하고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려는 이른바 정체성이론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3. 당파성론의 새로운 인식
3. 1운동이후 일인들의 당파성론 정립은 조선 건국에서 말기까지의 역사가 모두 당파성으로 꿰어져 버렸다. 이광수등 일부 조선 지식인들의 하수인적 역할을 통해 일인들의 악의에 찬 당파성론은 손쉽게 일반인들의 뇌리에 심어져갔다.
이런 까닭에 조선의 경제, 사회, 사상 등에 비해 조선의 정치사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평가 되어왔다. 이제는 조선시대의 정치사를 종래의 편견에서 벗어나 새로이 인식, 체계화 해야 될 것이다. 500년이나 되는 조선시대의 정치를 당쟁이란것 하나로 묶는 것 자체가 매우 비역사적 인 것이다.
5세기나 되는 긴 시간의 정치사는 의당 몇 단계로 나누어 파악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중환 ?택리지?
왕조초기 15세기 의결권을 가지는 삼공, 집행기능의 육경, 언론기능의 사간원, 사헌부 등 3자의 관계가 관료체제의 운영의 중심이었다.
16세기 체제는 운영상 질적인 변화가 있었다. 이조전랑에게 언론기관인 삼사관원에 대한 인사권을 일임 시켰다. 이조전랑에게 삼사를 규제, 조정하는 권한이 부여된 것은 기능상 삼공에 못지않는 비중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한 이조전랑의 직은 명덕을 겸비한 신진들 사이에서 명예를 걸고 후임을 천거하여 이어가도록 한 것은 붕당에 토에를 둔 사림사회의 공론을 존중하여 그것을 정치에 실제 직접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체제는 영조의 탕평책의 실시로 정치 운영체제가 크게 바뀌었다. 이조전랑의 삼사 규제권 폐지로 권력이 비변사 대신에 집중되고 언관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정치 구조 아래서 삼공, 육경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벌열세력 형성의 온상이 마련 되었다. 벌열세력의 태동은 영, 정조대의 강력한 왕권 아래서는 표면화 되지 못하였지만, 다음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 정치란 일족 전제의 기행적이고, 파행적인 정치 형태를 유발하였다.
택리지의 이상과 같은 간략한 논평에 따르더라도 조선 수백년의 정치가 [당쟁]이란것 하나로 묶여져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안확의 이론 : 진화론적 역사인식에서 조선시대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발달된 단계라고 규정한 안확은 망국의 원인과 책임을 따진다면 조선시대 역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엽에 대두한 세도 정치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정치권력이 특정한 소수에게 집중된 것이 망국의 원인이었다는 그의 결론이다. 이러한 이해체계는 결과적으로 민족사에서 부정되어야 할 범위를 그 만큼 줄이는 소득도 아울러 제공했다.
참고문헌
김진균·정근식(2000), 식민지체제와 근대적 규율,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김동춘(1996), 사상의 전개를 통해 본 한국의 근대 모습, 역사문제연구소 편,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비판, 역사비평사
민두기(2001), 시간과의 경쟁: 동아시아 근현대사 논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백낙청(1999),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99호(가을)
윤건차(2000), 일본의 동아시아 인식, 역사비평
이기백(1971), 민족과 역사, 일조각
이기백(1996), 우리역사의 여러모습, 일조각
이보형(1965), 제국주의 연구의 새로운 동향, 서울대학교 서양사연구회, 서양사 연구
홉슨(1982), 제국주의론,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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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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