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고학의이해]가야의 유적, 유물에 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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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고학의이해]가야의 유적, 유물에 관한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 서론

Ⅱ. 본론
Ⅱ.ⅰ. 가야란..
Ⅱ.ⅱ. 가야의 유물
Ⅱ.ⅱ-ⓐ. 가야의 풍부한 철
Ⅱ.ⅱ-ⓑ. 가야의 갑옷과 투구
Ⅱ.ⅱ-ⓒ . 가야의 마구
Ⅱ.ⅱ-ⓓ. 가야의 고분
Ⅱ.ⅱ-ⓔ. 가야의 토기
Ⅱ.ⅱ.-ⓔ.①. 평저주형 토기
Ⅱ.ⅱ-ⓔ.②. 토이
Ⅱ.ⅱ-ⓔ.③. 스에키토기
Ⅱ.ⅲ. 가야의 유적
Ⅱ.ⅲ.ⓐ. 금관가야
Ⅱ.ⅲ.ⓑ. 아라가야
Ⅱ.ⅲ.ⓒ. 비화가야

Ⅲ. 결론
Ⅲ.ⅰ. 전기 가야문화
Ⅲ.ⅱ. 후기 가야문화
Ⅲ.ⅲ. 요약 및 감상

본문내용

벼농사를 비롯한 농경문화와 조개채취를 비롯한 어로문화를 저변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토광묘·석곽묘 계통의 지배집단이 저변을 통괄하면서 철산업을 일으키고 해운을 이용한 중개무역에 주력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연맹은 다양한 문화기반을 복합적으로 영위하면서 발전하였으며, 특히 낙랑 등 선진지역과의 무역에 의한 문화수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문화의 축적을 이루어나갔다. 그러나 4세기초 낙랑의 소멸은 그 뒤의 전기가야문화 발전에 있어서 기본적인 제약요인으로 작용되었다고 보인다.
Ⅲ.ⅱ. 후기 가야문화
후기 가야문화는 5세기 이후 후기가야시대의 문화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으로는 경상도 안에서도 고령 이남의 낙동강 서쪽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수혈식석곽묘계통의 고총고분들이다. 그러한 유적의 예로는 고령 지산동고분군, 합천 삼가고분군, 옥전고분군, 봉계리고분군, 거창 말흘리 고분군, 남원 월산리 고분군, 함양 상백리고분군, 백천리고분군, 산청 중촌리고분군, 사천 예수리 고분군, 의창 신촌리 고분군, 김해 예안리고분군, 함안 말산리고분군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후기가야의 문화 중심을 이루는 것은 고령, 합천, 거창, 남원, 함양 등의 내륙산간지방이었으므로, 이들 지역의 문화적 성격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원래 서부 경상도 내륙지방의 민무늬토기시대 단계의 농경문화 전통은 상당히 두터운 것이었으나, 이 지역은 해운입지조건이 그다지 유리하지 않은 관계로 철기문화 파급이 늦어져서 전기 가야시대에는 문화발전면에서 경상남도 해안지대보다 뒤지게 되었다. 그러한 후진성 때문에 1∼4세기 단계의 철제무기·와질토기·고식도질토기·토광묘 등의 문화요소가 이 지역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기가야연맹이 와해된 5세기 이후에 이 지역은 경상남도 해안지대 선진문화의 파급으로 인하여 급속히 개발되어, 앞서 언급한 유적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정리해 보면 크게 토기유물과 금속유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가장 수효가 많은 토기 유물을 분류해보건데, 후기 가야토기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유개고배(有蓋高杯), 유개장경호(有蓋長頸壺), 개배(蓋杯), 발형기대(鉢形器臺), 외반구연단경호(外反口緣短頸壺), 무개장경호(無蓋長頸壺), 유대이부호(有臺耳付壺), 원통형기대(圓筒形器臺)의 순서이다. 이러한 토기의 조합상으로만 보아도, 후기 가야토기문화가 단경호 중심의 백제토기문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배와 장경호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신라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러나 5세기 이후의 신라토기에는 기대가 나타나지 않고 장경호에 대족(臺足)이 붙은 유대장경호가 대부분인데 비해서, 후기 가야토기에는 대다수의 장경호에 대족이 붙지 않고 따로이 기대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또한, 가장 많은 기형인 유개고배의 경우도 신라의 것과는 달리 대가의 투창이 이단직렬로 뚫려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즉, 후기 가야토기는 백제나 신라의 토기와는 다른 독자적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대부분의 후기가야토기들은 그 시원양식(始原樣式)을 김해 부원동패총, 창원 웅천패총, 성산패총, 부산 화명동 고분군 등 4세기 이전 전기 가야의 해안지대로부터 찾을 수 있다. 한편, 후기가야고분 출토 금속기 유물을 살펴볼 때 가장 많은 것은 철촉, 철겸, 도자, 철모, 대도(大刀)를 비롯한 철제무기이며, 마구·갑주·장신구 등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이 중에서 철기의 제작기술이 당시 백제의 발전된 기법인 초강법(炒綱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4세기 이전 경상남도 해안지대의 패총 유적출토 철기유물들의 제조법인 괴련강(塊鍊綱)과 같다는 점은 주목된다. 또한 철기의 종류를 보면, 전기에는 보이지 않던 대도, 마구, 갑주 등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후기가야문화의 성격이 전 단계보다 좀 더 정복적인 것으로 진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발전이 상당한 수준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에 계급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어, 순금제 장신구나 금동관 등의 유물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5세기 이후 서부 경상도 내륙지방의 고분 출토유물을 검토해본 결과, 후기 가야문화는 토기·철기면에서 전기가야의 해안지대문화의 계승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4세기 전반 이후 해운입지조건의 중요성을 상실한 데다가 5세기 초 전쟁의 피해까지 크게 입은 경상남도 해안지대로부터, 그 잔여세력 중 일부가 전 단계에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던 내륙산간지방으로 직접 파급되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서부 경상도 내륙지방은 전쟁의 피해도 미치지 않았고, 이전시대부터 양호한 농경문화 기반을 안정적으로 영유하고 있었으므로, 선진문화를 보유한 유이민들이 파급되어 들어오자, 농경사회 전체의 발전속도가 가속화되어 발달된 철기·토기문화가 나타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철산지의 확보라는 점은 중요한 것인데, 야로, 산청, 삼가일대의 철광산은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혁과정을 거치면서 후기가야의 토착세력들은 급속히 발전하여, 가야연맹의 재통합의 주체로 대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후기 가야문화의 성격은 이제 전기와는 달리 무역중개기지로서의 성격을 어느 정도 탈각하고, 토착농경에 기반을 둔 재지적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 만큼 정복이라는 요소도 중요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교역이나 대외교섭능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졌다는 것은 후기 가야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Ⅲ.ⅲ. 요약 및 감상
이처럼 가야는 소국 연맹체제에 머무른 채 고대국가를 완성하지 못해 하나의 국가로 취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기는 했지만 삼국과 관계를 맺으며 정치체제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그 기술도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여러 곳에 대한 다른 지식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해보고, 조사해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가을 답사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얻어왔으며, 앞으로 더욱 우리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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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03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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