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 중세교회사 핵심정리 서브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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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세교회사] 중세교회사 핵심정리 서브노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아우구스티누스의 목회신학

2. 종교재판

3. 성상 논쟁

4. 서임권 논쟁

5. 아비뇽 유수

6. 칼 대제

7. 교황 그레고리 1세

8. 면죄부

9. 교황 이노센트 3세

10. 헨리 IV(황제)(하인리히 4세)

11. 탁발 수도원

12. 알퀸

13. 교황 그레고리 7세

14. Bogomils (보고밀파)

15. 수도회의 역사

16. Waldensians (왈도파)

17. 윌리엄 옥캄

18. 보니페이스 8세

19. 오토 1세

20. 퀼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21. 사보나롤라

22. 교황권 재확립을 위한 종교회의

본문내용

준비가 되었을 때에 거짓된 열정을 고취하였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그의 활동 때문에 처형된 개혁적 이탈리아의 페랄라에서 출생하여 인문주의와 의학을 연구하였으나, 1474년에 한 도미니카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자연히 인문주의와 의학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1491년경에 몇 개의 북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섬겼고, 산 말코의 선임자였으며, 플로랜스에서 한 평범한 설교자이었던 거이다. 그이 설교들은 황금시대가 도래한 이후에 즉 플로랜스가 전체 이탈리아의 번영과 일치한 때에 그 도시에 큰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였다. 이러한 예고가 있었을 때는 찰수 8세 왕이 프랑스를 다스리고, 이탈리아를 침략한 때요, 프로렌스의 메디치 통치자들이 도망한 때였다.
새로운 정부하에서 사보나롤라는 그의 설교의 능력을 얻는 때가 되었다. 그는 세제를 개혁을 주도했으며, 가난한 자를 도왔으며, 법정을 개혁했고, 느슨한 또는 고루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덕적인 수도원이 되도록 변화시킨 것이었다. 그가 플로랜스를 개혁하면서, 그 다음으로 알렉산더 4세와 부패한 교황청을 탄핵하였다. 잇따라 일어나는 분쟁은 사보나롤라에게 파문을 당하게 되었다. 파문의 공포는 플로랜스에게 대해서도 임한 것이다. 이런 파문은 백성들을 두렵게 하였으며, 결국 그의 처형을 가져온 것이다. 사보나롤라는 많은 사람을 초기에 개혁가들이 되게 한 영웅이었으나, 그는 카톨릭 신학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교황권에 대해서나 후세대들에게 유용한 예를 보여 주었다. 그의 계승자들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절정에게 하였고, 이런 르네상스는 종교적 태도를 백성들 중에서 그 시대에서 깊숙이 나타내었으니, 이 시대는 가금 간과하는 수가 많다.
22. 교황권 재확립을 위한 종교회의
(1)피사 회의(1409)
①게르손이 교회의 타락을 우려하여 의회가 세력을 장악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음
②로마의 우르바누스 6세와 아비뇽의 클레멘트 7세는 불참
③교회 분열의 책임을 물어 두 교황을 퇴위시키고 밀라노의 대감독을 교황을 세워 알렉산드로 5세라고 칭하였다.
④두 교황이 퇴위를 거부하게 되자 결국 세 명의 교황이 싸우는 꼴이 되었다.
(2)콘스탄쯔회의(1414-1418)
①회원 : 요한 23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문트 등 신학자, 귀족이 약 5,000명
②회의방식
1)감독단위 투표권을 무시하고 국가단위 투표권을 인정
2)요한23세의 세력기반 약화로 회의의 권유에 따라 자진 사퇴
3)결의사항
①세 교황을 면직시키고 마르틴 5세 선출에 성공
②마르틴 5세는 교회회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교회회의에 복종을 서약하고 취임
③쟝 후스 정죄 - 신변 안전 보호의 약속을 받고 출두했으나 토굴에 감금하고 사형선고
④죤 위클리프 정죄 - 저서를 소각하고 뼈를 불사르기로 함
⑤교황의 최종 권위는 종교회의에 있으며 교황은 최고 행정 관리에 지나지 않고 종교회의의 심판과 평가의 대상이 된다. - 교황의 제한 결의
4)영향: 교회회의를 교황권위보다 우위라고 결정함으로써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침
(3)바젤회의
1)목적: 교회 전체의 개혁, 이단 박멸, 교단의 평화 도모를 위해
2)일시:1431년 1월 소집, 7월에 정식으로 개회
3)경과:
①교황의 멋대로 정지명령이 내려짐
②회의 강행 최고의 주권은 종교회의에 있다고 하여 교황이 불참한 가운데 회의를 강행
③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문트가 교황의 출석을 요구했으나 사탄의 회의라고 거부
4)결의사항
①교황권 제한 결의 재확인
가. 대회의는 교황 위에 있다.
나. 교황의 전제와 강제 징수를 제한 할 것.
②보헤미아의 훗스당과 협정 체결
가. 성찬 때 원하는 신자들에게 떡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줄 것.
나. 죄있는 자는 처형한다.
다. 장로, 집사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로 설명할 권한이 있음
라. 성직자도 재산의 소유가 가능하지만 청지기로 사용할 것
③교황체제에서 회의체제로 바뀌어 교회행정의 민주화 시도 결의
④교황의 전제권 강화, 교황청을 위한 강제징수 제한 결의
⑤성직자의 독신 재확인
⑥마리아 무흠설 확인
⑦교회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분열자요 이단분자라는 죄명으로 교황을 파면하고 펠릭스 5세를 세움
5)결과
①유진4세가 폐위에 불복, 망명하다가 죽고 니콜라스 5세가 계승
②펠릭스 5세와 니콜라스 5세의 대결
③1449년 니콜라스 5세를 합법적으니 교황으로 받아들이기로 승복하고 폐회
(4)피렌체 회의(1438-1439)
1) 회의 소집 원인
①터어키 군의 위협으로 헤라교회 및 동로마 황제가 서방교회의 원조를 요청
②바젤회의에서 수세에 몰린 유진 4세가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협조
③교황과 그 추종자들이 당면한 개혁을 무시하고 이태리 페라라에서 헬라교회와 회의
④회의 도중 장소를 피렌체(프로렌스)로 옮김으로 피렌체회의라고 명명
2)안건: 헬라 교회의 원조 및 로마교회와 그리이스교회의 재결합 문제
3)회원
①바젤회의를 반대한 교황, 이탈리아 교직자
②그리이스 황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4)결의내용
①성령의 출처 문제
가. 서방교회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동방교회는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말미암아' 라는 문구는 결국 같은 것으로 받아들임(동방교회)
나. '아들로부터'(Philioque)라는 문구를 서방측이 삽입할 수 있다고 주장(서방교회)
②연옥의 불의 성질: 정신적, 물질적임을 양편 다 생각(동방교회)
③성찬시 떡
가. 누룩의 유무에 관계가 없다.(동방교회)
나. 화체설을 결정(서방교회)
④교황권
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목자요, 교사요, 통치자이다(서방교회)
나. 동방대주교의 특권과 권리는 보류
4)결과
①전체 합의문에 양측이 조인
②서방교회는 군사적 지원 약속
③합동 축하 예배를 드림: 1439년 7월 6일 피렌체 예배당에서 거행
④합동의 결렬
가. 황제가 귀국하니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사늘리아 교회의 대주교들이 협상대표들을 변절자로 몰아부치고 반대함으로 실패
나 . 이들은 피렌체 회의를 강도회의라고 하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이단으로 정죄
다. 1472년 동방교회가 정식으로 합동의 무효화를 선언
⑤동로마 제국의 멸망: 1453년 모하메드의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 동로마는 멸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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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01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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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8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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