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제국주의의 문제와 탈식민주의의 전략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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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식민지 영어와 탈식민주의 인식론

2. 탈식민주의 논의의 배경

3. 탈식민과 문화다양성

4. 영어제국주의의 문제와 탈식민주의 담론

5. 탈식민주의의 전략과 효과

6.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찻잔 속의 태풍'처럼 보인다. 그러나 응구기는 영어제국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영어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어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또한 기쿠유어가 영어 못지않은 미학적·학술적 가치를 지닌 언어이며, 한때의 필명이었던 '제임스 응구기'보다 '응구기 와 씨옹오'라는 본명이 더 아름답고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자 한다. 그렇기에 응구기의 실천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소망충족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개입하면서도 현실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이중의 기획이다. 그 이면에는 "아프리카를 서구의 눈으로 보는 습관을 극복하는 것은 아프리카어의 주변성을 극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희망 섞인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 Ngugi, "Preface to the Revised Edition 1997," xiv면.
동시에 거기에는 "자신을 노예로 인정하지 않는 노예는 결코 온전한 노예가 아니다"는 제3세계 작가의 자긍심과 저항의지가 깔려 있다.
) Ngugi, "Literature and Society," 8면.
응구기의 이러한 믿음과 용기는 오늘의 탈식민주의가 갖추지 못한 미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늘에 편입되면서 주변성은 극복했지만 전복성은 상실한 탈식민주의로서는, 응구기의 주장을 토착주의자의 무모하고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일축하기 이전에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응구기는 서구화와 제도화의 길을 걸어온 탈식민주의를 불편하게 만들지 모르지만, 그런 불편함은 생산적 긴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탈식민주의의 잊어버린 과거를 기억나게 하고, 파농의 성난 절규와 바바(Homi K. Bhabha)의 정교한 이론적 유희 사이에 놓인 괴리를 확인시켜준다. 만약 응구기의 외침이 서구의 제도권 아카데미즘에 안착한 탈식민주의에게 달갑지 않은 참견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탈식민주의가 그만큼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로부터 멀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아체베와 응구기는 영어제국주의에 대한 두가지 저항방식을 대변한다. 한쪽이 현실론이라면 다른 한쪽은 당위론이다. 혹은 전자가 상대적으로 언어의 도구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언어의 이념성에 주목한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입장 차이가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다. 아체베와 응구기가 탈식민주의의 실천방안으로 내세우는 전유와 거부는 양자택일의 상호배타적 관계가 아닌 수단과 목적의 상호보완적 관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거부가 탈식민주의의 욕망이요 의지라면 전유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다. 즉 응구기의 원칙주의는 아체베의 실용주의가 서구의 담론적 전략에 포섭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불침번이며 탈식민주의의 무디어진 비판의 칼날을 다시 예리하게 만드는 벼루의 역할을 한다. 아체베를 어중간한 타협주의자로, 응구기를 완고한 거부주의자로 간단히 규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아체베의 지혜와 정면도전을 외치는 응구기의 용기가 동시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접근이 이루어질 때 프로스페로의 억압에 대한 캘리번의 저항은 더욱 효과적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6. 결 론
탈식민주의가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공모하느냐 대항하느냐의 문제는 탈식민주의를 실천하는 주체의 ‘위치’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제3세계 탈식민주의와 서구 포스트모더니즘(혹은 그것의 부분집합이 되어버린 제1세계 탈식민주의)이 이념적?이론적 토대와 정치적 효과에 있어서 중첩되는 부분만큼 상충하는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둘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는 피해자의 저항이고 다른 하나는 가해자의 반성이라는 데 있다. 더구나 그 반성마저 온정주의적 시혜나 감상주의적 유희로 흘러간다면, 그것은 제3세계와 제1세계를 함께 묶을 수 있는 탈식민주의가 아니다. 물론 피해자의 고통을 가해자의 양심에 저당 잡힐 수 없다는 논리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근시안적 역사관의 표현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제3세계적 탈식민주의’만의 진정성을 내세우는 것도 본질론적 오류에 빠진 토착주의자의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이나 오류를 피하기 위해 탈식민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적 관광여행을 위한 가이드 역할에 충실하다보면 제3세계라는 저항 주체를 스스로 타자화하고 주변화하는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그들’의 퍼포먼스가 대신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헛된 미망(迷妄)임을 잊어버릴 때, 탈식민주의는 칼리반의 욕설 담긴 말대꾸에서 아리엘의 무기력한 푸념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회한과 노스탤지어가 뒤섞인 프로스페로의 회고록으로 변질해갈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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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03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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