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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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개 요

□ 광복전후 국내외환경
광복 전 국내 상황
연표

□ 4.3사건
원인, 배경, 전개과정
미친 영향, 결과
진상
결론 및 평가

□ 여, 순사건
원인, 배경, 전개과정
미친 영향, 결과
영향
결론 및 평가

□ 제주 4. 3사건, 여, 수사건의 비교
연계성, 비교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피살과 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악명 높은 서북 청년단과 응원 경찰의 입도로 미군에 대한 도민들의 항쟁은 더욱 거세어 지게 된다. 마침내 1948년 4월 3일 밤 1시경 드디어 역사에 높이 평가된 제주 4.3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항쟁은 수많은 도민의 참여로 장기간 계속되게 되고 이에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제주도를 제외)로 당선된 이승만은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했던 1948년 10월 19일 당시 여수 신월리에 주둔 중이던 제14연대 병사들에게 4.3항쟁 이후 제주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우익계 장교 20여명을 사살하고 거부한 것이 바로 여순사건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서 제주항쟁은 미군정의 남한 정책에 반대하고 순수한 해방을 원하며 남한만의 총선거가 아닌 남북한 총선거가 되길 바라며 5월 10일 남한선거를 반대한 제주도민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라면 여순사건은 이러한 항쟁중인 제주 도민을 탄압하라는 미군정과 정부에 반대하며 남한을 통치하는 우익계인물을 사살하고 남한 우익계정부에 대한 항쟁이라 할 수 있다.
제주 43사건, 여수사건의 비교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은 비슷한 시기에 서로 맞물려 발생한 사건으로 미군(우익)의 남한점령통치에 반대하여 생긴 사건인 만큼 서로 공통점도 많이 존재하며 그에 반해 순수한 동족간의 이념대립(좌, 우익)이 주를 이룬 여순사건과 미군의 남한점령통치를 반대한 순수 항쟁인 제주 4.3항쟁은 차이점을 나타낸다.
두 사건은 반정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미군에 의해서 거의 모든 사항이 결정되어지는 정부의 모습은 사건의 발달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반정부적 성격도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약간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제주항쟁은 자주적인 정부를 원해서 미군의 압박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라면 여순사건은 자신들의 이념인 좌익과 다른 미군정과 정부의 우익이념에 반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의 전개과정에서의 내면적 원인을 보면 미군을 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군의 개입이 눈에 띄는데, 각 사건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제주 항쟁에서는 우리나라 정부에 압박뿐만 아니라 좀더 적극적이고 미군을 투입한데 반해서 여순사건에서는 압박을 가할 뿐 뚜렷한 무력의 개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정부의 설립 이전이어서 미군의 무력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순사건과는 다르게 제주항쟁에서는 제주도민의 미군의 남한점령정책을 반대하고 시위한 것에 대한 보복행위이며 그러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 및 방화 겁간 등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깨끗이 처리하여 국제사회에서의 비난을 면하려고 하는 미군의 생각이 이유였다고 후세 평론가들은 평가하고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두 사건 모두에서 수많은 학생들의 참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제주항쟁 역시 500여명의 젊은 소년, 소녀가 참여하였고, 여순사건은 조금 더 체계적으로 휴교를 하고 학생들이 모여서 대항 하였다. 그에 따라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건으로 인해서 발생한 사상자는 제주 항쟁의 결과로 30만의 도민 중에서 7만 명에 이르렀고 여순사건에서는 5530명이나 되었다. 두 사건 모두 역사에 남을 만큼 엄청난 인명피해를 만들었으며 수많은 유가족을 남겼다. 하지만 이부분에서도 역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건에 참여하여 대항한 사람들의 수는 많지만 제주항쟁에서는 순수한 도민들이 정부의 군인에게 대항하여 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남겼다면, 여순사건에서는 제 14연대의 좌익계 군인들과 학생들(좌익계) 과 여수와 순천의 시민들 중 좌익계 시민들이 참여하여 반대의 이념을 가진 미군과 남한정부와 대립하여 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남겼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두 사건의 순수성에 대해서 비교해본다면 제주 항쟁이 순수한 주권을 되찾고 남북의 단일 국가를 원한 것이라면 여순사건은 우리 민족의 비극인 남북 분단의 원인인 좌, 우익 이념의 대립을 막을 생각은 커녕 오히려 자신의 이념을 전반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차이점을 보자면 사건 전개에서의 활동과 범위를 말할 수 있다. 제주항쟁은 제주도에 국한되어서 그저 미군정에 항쟁한 것이라면 여순 사건은 제주항쟁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면을 보입니다. 여수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정부에 대항하는 것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수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순천까지 진격하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완전히 점령하고 정부와 대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주항쟁과는 달리 여순사건은 좌익계군인이 지휘를 함으로써 좀더 체계적으로 대립이 가능하였고 경찰서등을 습격하여 많은 무기를 획득할 수 있어서 가능하였던 일인 것이다.
이런 전개과정을 끝으로 두 사건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벌어진 이 사건은 결론부터 말하면 모두 실패였다. 제주항쟁은 미군의 무분별한 진압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여순사건 역시 정부가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눈여겨 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두 사건의 목표에서 비롯된 차이점 이다. 제주 항쟁은 순수한 미군의 우리나라에 대한 국권 침탈을 반대하여 생긴 일이어서 미군이 삼광삼진작전으로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면서 마무리되었다면 여순사건은 제주항쟁과 다르게 좌, 우익 세력의 대립으로 생긴 사건인 만큼 마지막 진화 작업에서 군인과 경찰뿐만 아니라 정부와 시민들 중에서 우익세력인 사람도 포함되어서 철저한 좌익세력의 분별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역사에 한 장을 장식한 두 사건의 결말은 상당히 비슷한 면을 나타내고 있다. 수많은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고 실패로 끝났지만 그래도 후세에는 항쟁으로 그리고 맘속 새겨두어야 할 사건으로 평가되어있다.
참고문헌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제주 4.3 연구소, 역사비평사, 2002
<4.3과 제주역사>, 박찬식, 각, 2008
<제주민중운동사>, 제민일보 4.3 취재반, 전예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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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8.11.05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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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89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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