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몽고]몽골(몽고)의 창세신화, 몽골(몽고)의 건국, 몽골(몽고)과 징기즈칸(징기스칸), 몽골(몽고)의 지리적 특성과 건축, 몽골(몽고)의 정치와 경제, 몽골(몽고)의 교육, 몽골(몽고)의 종교와 신앙 분석(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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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몽골][몽고]몽골(몽고)의 창세신화, 몽골(몽고)의 건국, 몽골(몽고)과 징기즈칸(징기스칸), 몽골(몽고)의 지리적 특성과 건축, 몽골(몽고)의 정치와 경제, 몽골(몽고)의 교육, 몽골(몽고)의 종교와 신앙 분석(몽골)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몽골(몽고)의 창세신화

Ⅲ. 몽골(몽고)의 건국

Ⅳ. 몽골(몽고)과 칭기즈칸(징기스칸)

Ⅴ. 몽골(몽고)의 지리적 특성과 건축
1. 게르
2. 고비사막
3. 몽골고원

Ⅵ. 몽골(몽고)의 정치와 경제
1. 정치
2. 경제

Ⅶ. 몽골(몽고)의 교육

Ⅷ. 몽골(몽고)의 종교와 신앙
1. 전통신앙
2. 티베트 불교
3. 기독교와 이슬람교

참고문헌

본문내용

되었고, 20세기 초기에 750여 개에 달하던 사원은 단 한 곳도 온전하지 못한 채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비공식 집계에 의하면 이 시기에 10여 만에 달했던 승려 중 3만은 즉결 처형되고 7만은 강제 환속되었다고 한다) 세계 여론을 의식한 몽골인민공화국 정부는 1944년에 울란바타르 소재 간단테그칠링사(寺)를 복구시켰지만 이는 몽골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외몽골 사례가 보여주는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 탄압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몽골 지역과 부리야트공화국 등 다른 지역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몽골 각 지역의 정치상황이 변화될 때까지 이어졌다. 변화의 파고는 중국령 내몽고 자치구에서부터 밀려왔다.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몽골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한 관용으로 이어졌고, 그 물결 속에서 한정된 범위에서나마 몽골인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몽골국(외몽골) 상황은 이보다 훨씬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989년 이후 몽골국에서는 정치적인 민주화 운동과 함께 전통문화의 복원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민족주의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사회주의 시절에 탄압받았던 전통종교와 신앙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는데, 불교는 이 때 몽골 민족주의의 상징으로서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으면서 민족종교로서 위상을 굳건히 했다. 그러나 불교가 국민들의 성원 속에 부흥한 지난 10여 년은 개방이라는 대외여건의 변화에 따른 외래종교의 유입으로 불교 그 자신의 위치를 방어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불교도 입장에서 보면 이제 정치권력으로부터 가해지는 물리적인 탄압과 박해는 사라졌지만, 어찌 보면 그보다 더 무섭고 더 버거운 상대와 몽골인들을 놓고 다투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동안 양적으로 성장한 몽골 불교가 이를 질적인 발전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이제는 자유롭고, 그리고 도전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이 몽골인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할 수 있느냐 없는냐에 달려있다.
3. 기독교와 이슬람교
문화의 이동통로로서 몽골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몽골에는 이른 시기부터 다양한 외래종교와 사상이 유입되었다. 특히 몽골인들의 지배가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대되는 13-14세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景敎), 이슬람교, 도교, 불교, 카톨릭 등 여러 종교가 몽골 지역에 전해졌다. 이처럼 다양한 종교가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 지배층의 전략적인 고려와 그 무렵 몽골초원에 체계화된 종교와 사상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이건 이질적인 요소와 소수약자에게 비교적 관대한 몽골인들의 정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리한 정치·사회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때 전래된 종교나 사상은 몽골땅에 확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 전통도 후대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예를 들면 13-14세기 몽골과 원나라에 왕정에는 다수의 이슬람상인과 정치인이 활동했지만, 그들에 의하여 몽골인들이 어느 정도 개종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물론 원나라 멸망(1368년) 이후 이른바 북원시대에 서몽골인들의 이름 속에 마흐무드, 이스마일 등 이슬람식 이름이 확인되고 있지만 몽골에 본격적으로 불교가 수용되는 16세기 말기 이후에는 그나마도 종적을 감추어버린다. 현재 내·외몽골을 통틀어 이슬람교를 믿는 몽골인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을 만큼 극소수에 불과하다. 다만 19세기 후기에 중국 신강성에서 몽골국으로 이주한 카자흐인들(약 10만)이 이슬람교(순니파)를 신봉하는 정도이다. 따라서 몽골인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교는 어디까지나 이민족의 종교이고, 또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슬람교가 몽골인들을 개종시킬 가능성은 앞으로도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아도 좋다.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몽골인들이 최초로 접한 기독교는 동방 기독교라 불리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이다. 이 종파는 12세기에 처음 전해진 이후 몽골과 원나라 황실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많은 신자를 확보했다. 13세기 중엽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명으로 몽골을 방문한 프란스시파 교단의 수도사 윌리엄 루브룩에 의하면 몽골에는 많은 기독교들이 살고 적지 않은 몽골 귀족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 당시 몽골지역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상당히 성행했다는 것은 내몽고자치구 올란차브맹 백령묘(百靈廟)의 한 궁전 기단석에 새겨진 십자가로도 확인이 된다. 카톨릭 역시 몽골인들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 황실과 조정의 보호를 받으며 번창했다. 카톨릭은 특히 중부와 남부지역의 몽골인들 사이에서 많은 신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나라가 망하고 몽골인들이 다시 몽골초원으로 돌아간 북원시대 이후에는 일부 몽골인들 사이에서 변형된 신앙의 형태로서 그 잔재가 확인될 정도로 기독교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몽골지역에 재차 기독교(개신교/카톨릭) 선교사가 전해진 것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때 몽골인들 사이에서 포교가 쉽지 않았음은 노르웨이 선교사 네스테가르드의 사레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핀란드의 언어학자 람스테드는 1908년 현재 9년째 우르가(현재의 울란바타르)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네스테가르드가 몽골인들을 개종시키기는커녕 도리어 라마승들의 논리에 설파당하여 쩔쩔매는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몽골인 거주지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는 당연히 기독교의 유입도 금지되었다. 그 후 1990년대에 들어와 몽골지역이 개방되면서 세계 각지의 수다한 종교와 함께 기독교도 몽골인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개신교는 특유의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벌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문헌
1. 김종래(2006), 크레듀(credu)
2. 박원길(1999), 몽골문화와 자연지리, 민속원
3. 이효선(2004), 몽골초원의 말발굽소리, 북코리아
4. 이혜정(2004), 미미의 몽골이야기, 책읽는 사람들
5. 장올루(2006), 칭기즈칸과 몽골제국, 시공사
6. D, 마이달·N,출템(1991), 칭기즈칸의 리더십 혁명, 몽고문화사,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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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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