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계를 중심으로 본 조선시대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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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조선의 무뢰배들
ⅰ) 화적(火賊)
ⅱ) 검계(劍契)
ⅲ) 왈자(闊者)
ⅳ) 자객(刺客)
ⅴ) 검객(劍客)

Ⅲ. 숙종시대(肅宗時代)의 검계

Ⅳ. 영조시대(英祖時代)의 검계

Ⅴ. 순조시대(純祖時代)의 검계

Ⅵ. 맺는 말

본문내용

엄중하지 못하여 죄다 제거하지 않았으므로, 사옥(邪獄)의 여얼(餘孼)들이 다시 치열해질 근심이 없지 않으니, 곧 이는 검계(劒契)가 함부로 날뛰던 바로 그 남은 여추(餘醜)입니다. 그런데 도성의 백성들이 점차 물들어 서로 이끌고 저들 편에 들어가고 있는 것은 또한 술의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아! 도하(都下)의 장요(長腰)는 모두 술을 만드는 집에 들어가고, 저자의 어육(魚肉)은 죄다 술집에 돌아가니, 근래에 물가가 오르고 백성들의 생활이 고생스러운 것은 주로 이런 때문입니다. 진실로 금주령(禁令)이 또한 백성을 소요(騷擾)케 하는 단서에 관계됨을 알고 있으니, 비록 전연 금단(禁斷)할 수는 없다 하나, 거리에서 풍성한 안주에 술판을 벌이는 데 이르러서는 어떻게 낭비하는 데에 맡겨두어 무궁한 폐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추조(秋曹)와 경조(京兆)·포청(捕廳)에 신칙해서 무릇 간귀(姦)한 이름이 검계(劍契)에 들어간 자는 한결같이 모두 기포(譏捕)해서 기필코 초절(初絶)할 것이며, 도하(都下)의 큰 양호(釀戶)도 또한 엄금함으로써 그 근원을 막게 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순조실록」순조 3년 8월 9일 기록. 본 레포트에 필요하지 않는 부분은 후략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검계가 얼마나 난동을 부렸는지, 어째서 이동식이 상소까지 올리게 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이토록 조선시대의 검계는 그 정도가 굉장히 심하였다.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이 조직을 이루었으며, 사비를 들여서 칼을 마련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소와 송아지를 팔아서 구입했을 정도라면 당시 칼의 가격이 상당했다는 것 이와는 다른 경우지만 『조선왕조실록』「영조실록」영조 30년 5월 14일 기록에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이번 사행(使行) 때에 시민(市民)이 으레 왜장검(倭長劍) 2병(柄)을 사서 바쳐야 하는데 1병은 겨우 4백 냥으로 샀으나 1병은 살 길이 없었고, 또 시민은 말하기를, ‘호조에 이미 통검계(通劍契)가 있는데 어찌하여 시민으로 하여금 사서 바치게 하는가?’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하나의 검 값이 그렇게 많은가? 이 때문에 시민에게 폐해를 끼칠 수 없으니, 특별히 내장(內藏)의 왜장검 2병을 주고 시민이 비싼 값으로 사서 바친 것은 도로 주도록 하라.”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당시 검이 얼마나 비싼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검계의 일원이 되는 것이 크게 쉽지 않았으며, 어찌하여 유복한 가정의 자제들이 후기 검계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약탈하는 것을 가계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으나, 상황의 심각성을 말하기 위하여 쓴 글 일 수도 있다고 본다. 화적처럼 이를 전문적으로 한다고 하면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즉 유복한 자녀라고 하더라도, 현재 학생들이 자신의 용돈을 벌어 쓰는 것처럼 약탈을 통하여 자신들의 재화를 벌지 않았는가 한다.
이동식(李東埴)의 상소를 통하여 후기 검계로 인하여 당시 사회가 얼마나 어지럽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술을 언급하여 이 검계와의 연계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조선 후기의 경제가 검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검계는 이러한 술과 음식의 주 소비층이었으며, 이에 따라서 당시 조선시대의 사람들의 분화와 검계로 대표되는 자들(이를테면 왈자)의 소비로 인하여 변해져가는 생활상 등을 엿볼 수 있다.
즉 어떤 백성들은 못 먹어서 안달인데 반해, 몇몇 사람들은 기생집에 드나들면서 돈을 펑펑 쏟아 붓고 그 재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불쌍한 백성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거나 오늘날의 조직 폭력배들과 비슷한 양식으로 행동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계층화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상황 중 하나였는데, 검계는 악독한 방법을 통하여 계층화를 실행하였고,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알게 모르게 조선의 경제상황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르게 추측한다면 검계는 오늘날의 조직 폭력배처럼 기생집과 손이 맞닿아 있을 수도 있다. 즉 기생들을 불러오고 차출하는 등에서 무력을 통하여 이를 장악하고, 돈과 연결시켜서 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검계보다도 당시의 보이지 않는 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듯 하다.
Ⅵ. 맺는 말
그동안 조선시대에 대한 많은 인식이 삶의 탄력이 없는 시대라고 보는 견해가 팽배하였다. 그러나 본 레포트에서 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느낀 바로는, 오히려 역동적이며 활발하고 사람냄새가 나는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지금의 조폭과도 비교되는 이 검계는 더욱더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다면 그 원형을 어렵잖게 복원 할 수 있으리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최근 들어 조선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언론 매체 등에서도 조선 생활사를 자주 다루는 실정이라 앞으론 조선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많이 바뀌리라 본다.
사실 나로서는 무기사와 군사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본래는 착호갑사라는 독특한 주제에 대해서 다룰까 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굉장히 미약하기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1차 사료도 여럿 전해지는 검계를 주제로 다루게 되었다. 막상 검계를 주제로 잡으니 이에 대한 자료가 굉장히 적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로 인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야회통』의 기록을 최대한 이용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검계는 조선 후기 사회상에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검계의 영향력이 도성(都城) 내에 국한되었다는 점이고, 이들은 사회 개혁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한계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란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보아야 하며, 이러한 것이 부족하고 현재적 관점으로서만 바라보고 이해한다면 도리어 굴절된 역사가 보인다고 생각한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조선의 무뢰배들
ⅰ) 화적(火賊)
ⅱ) 검계(劍契)
ⅲ) 왈자(闊者)
ⅳ) 자객(刺客)
ⅴ) 검객(劍客)
Ⅲ. 숙종시대(肅宗時代)의 검계
Ⅳ. 영조시대(英祖時代)의 검계
Ⅴ. 순조시대(純祖時代)의 검계
Ⅵ.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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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2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1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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