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임노동자의 거취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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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환-
→ 단어의 유래를 통해서 본 빈민의 흔적
동성의 동남(왕십리 일대)은 땅이 낮고 습하며 넓은데 군오들이 그곳에 살며 채마밭을 가꾸고 수예로 먹고 살고 있으니 시골사람과 같다. <옥계청유첩서>
→ 군오의 위신추락과 행색의 초례함을 예상케 한다.
이 일대(왕십리)의 근교농업이란 자가소비가 아닌 서울의 시장을 겨냥한 상업적 영농이었으니 훈련원 근처는 배추의 재배지로 유명하여 여기서 나는 배추는 ‘훈련원배추’란 이름이 불이었으며 성밖의 왕십리는 무와 미나리의 재배지로 유명하였다. ‘왕십리 미나리장수’란 말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강명관 <조선후기 서울상안의 신분별 거주지>
→왕십리주변의 빈민(군오를 포함)들이 소규모의 상업적 영농을 행했음을 추정해 볼수있다.
→고지도를 통해 확인해 보는 왕십리 일대
규장각 청계천 1970년대
→다시 임노동자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임노동자들은 역사(役事)가 있다는 소문만 듣고도 벌떼처럼 모여 들였다.
《승정원일기》1724책, 정조17년 12월 8일
→농촌사회의 양극 분해가 촉진되고 봉건적 착취가 심해지면서 토지에서 유린된 농민은 날로 증대되었고, 그들은 마침내 고향을 버리고 유민화돠어가 도시로 모여들어 도시빈민층을 형성하면서 고용의 기회를 기다리고 만 있었다. 임노동을 생업으로 삼게된 이들은 이제 보다 많은 노임과 좋은 작업조건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영조7년(1731) 인조의 장릉을 이장할 때 작업을 연장시키려 하지 인부들이 일제히 이에 저항하고 즉시 흩어졌다. 이에 관부는 그들을 회유하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끝내 귀환하지 않았다.
효종8년(1657) 창덕궁보수 공사에서 노임에 불만을 품고 인부의 일부가 도망 간일
숙종 원년(1674) 현종의 산릉역에서 일조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노임을 감하려 하자 거칠게 항의한 일
윤용출,<178세기 역부○립제의 성립과 전개>(≪한국사론≫8,서울대 1982년)
→노임은 임노동의 대가로 그들을 고용한 고용주에게서 받는 품삯으로 , 매일 지급또는 월별로 지급 되었으며 생산성이나 능률에 견주어 노임을 결정
*발표시 첨부할 자료:조선후기 시기별(인조~정조) 산릉역과 궁궐, 축성역의 노임표
→일반적으로 월급은 쌀 9두 면포3필의 수준이 관례화
노동자들은 그 신체적 조건, 성별, 노소에 따라서 노임의 차가 있었다. 그리고 노임은 같은 일이라도 지방에 따라 다르고, 광산같은곳에서는 광산마다 차이가 있어 조건이 좋을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기도 하였다 <목민심서>
유민들이 노동의 기회를 확보하고 전업적 노동자로서 자리를 굳혀갔다고 하여도 광산이나 수공업촌에서 잡역부로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들의 생화처지는 매우 불안정하고 열악하였다. 황막한 광산촌에 내던져진 광부들은 폐광이 되면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스산한 환경 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전석담,허종호,홍회유《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70 ; 이상과 현실, 1989),144쪽
발표시 참고자료
*현재의 서울지도를 통해서 본 임노동자들의 거취구역과 청계천위치 확인
  • 가격1,5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9.01.03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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