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3경 건설과 고려의 천도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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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3경 건설과 고려의 천도 논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고려의 3경 설치

2. 고려 역사에서의 천도 논의
1) 서경천도논의
2) 남경천도논의
3) 고려 말 천도 논의 및 시도

본문내용

하게 된다 하였거늘 너희는 어찌 홀로 불가하다고 고집하느냐’고 하였다. 『고려사』 권45 세가 45 공양왕 2년 7월
병오丙午에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는데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原과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에게 명하여 송경松京에 유수留守하게 하고 또 백관으로 하여금 분사分司하게 하였다. 『고려사』 권45 세가 45 공양왕 2년 9월
경술庚戌에 어가御駕가 한양漢陽에 이르니 (중략) 백희百戱를 베풀어 맞이하려 하거늘 王이 그만두게 하고 입어入御하였다 『고려사』 권45 세가 45 공양왕 2년 9월
정유(丁酉)에 남경(南京)으로부터 돌아오니 도성 사람들이 채붕(綵棚)을 매고 맞이하였다 고려사 권46 세가 46 공양왕 3년 2월
물론 이 때의 천도도 우왕 때처럼 일시적인 이어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천도 단행 후 여러 가지 불상사가 발생하고 공양왕 2년 9월 갑인(甲寅)에 범이 신도문하부(新都門下府)에 들어와 사람을 후려치고 도망갔다. 한양으로 옮긴 지 겨우 수일(數日)인데 범이 많이 사람과 가축을 해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므로 왕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백악(白岳) 목멱성황(木覓城隍)에 제사를 지내 이를 가셨다. ( 『고려사』권54 지8 오행 금 범, 여우, 사슴이 성에 들어옴)
, 형조판서(刑曹判書) 안원(安瑗)이 술사(術士)가 주장한 지덕의 쇠왕설에 따른 천도에 반대하여 안정된 생활여건이 보장되는 개경으로의 환도를 주장하자 결국 공양왕은 천도한 지 6개월 만에 3년 2월에 한양을 떠나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한양천도의 논의와 반대, 실행과 개경환도의 사실은 비록(秘錄)의 도참설에 따라 왕권의 안정과 국운의 연기를 바라는 국왕의 입장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적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개혁정치를 추진하고 있던 신흥사대부의 입장 차이로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한양천도와 개경환도의 문제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몰락의 나락에 선 보수 위정집단과 신흥 개혁세력간의 주도권 쟁탈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나각순, 「高麗末 南京復置와 漢陽遷都」, 『강원사학』, 강원대학교 사학회, 2002, pp.127~128
맺음말
고려사에서 무수히 많은 천도 논의가 있었다. 주로 고려가 설치한 3경 중 서경, 남경 중심이었다. 그런데 왜 고려 3경 중 하나인 동경에는 천도논의가 없었을까? 그건 아마 동경의 지리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동경은 지리적 특성 상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수도로서의 기능보다는 경상도 지방의 거점 도시로서의 역할을 못했고, 게다가 풍수지리상에 의하면 오랫동안 신라의 수도로서 기능을 했기 때문에 지덕이 쇠했을 것이라는 풍조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신종 5년 동경에서 일어난 신라 부흥 운동 탓에 더 이상 동경은 3경에서 거점 도시로의 위치가 격하되었다.
광종 시기에는 왜 서경 천도 운동이 논의되지 않았을까? 그건 광종이 노비안검법의 실시, 과거제도 시행, 공복 제정 등으로 왕권이 강화된 이상 굳이 서경으로 천도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종의 죽음과 함께 서경세력의 몰락과, 거란의 흥기로 거란과의 국경과 가까운 서경으로의 천도는 고려 조정으로서는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공민왕과 우왕 시기 3경 외에 강화도나 철원으로의 천도 논의는 어떻게 살펴보아야 할까? 강화도로의 천도 논의는 관련 자료가 없어 순전히 필자의 추측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강화도는 몽고와의 전쟁 시기 수도로서의 역할을 한 곳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복주(안동)까지 피난을 가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차 있을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강화도로의 천도를 추진하지 않았나 싶다.
우왕 대의 철원 천도 역시 당시 고려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왕 시기는 왜구의 침탈이 극심한 시기였다. 왜구는 심지어 내륙지방과 수도 개경 인근 까지 약탈할 만큼 고려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륙에 위치한 철원으로의 천도 논의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여기에는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 철원의 풍수지리적 조건도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 말 도선에 의해 소개된 풍수지리사상은 고려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록 고려가 정치이념으로는 유교 이념을, 종교 · 문화 · 사상으로는 불교를 채택했지만, 풍수지리가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신라 말 호족들이 독실히 믿은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 건국 이후 역대 왕들이 그것을 신봉할 정도로 고려 임금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배경을 풍수지리에서 보았고, 왕건 이후 역대 왕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천도하고자 할 때 풍수지리 사상을 이용하였고, 고려 말 때까지 풍수지리사상이 도읍지 선정에 이용될 만큼 풍수지리가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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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4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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