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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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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궁궐의 개념

Ⅱ. 궁궐의 형성과 기원
1. 궁궐의 형성
2. 궁궐의 기원

Ⅲ. 경복궁
1. 광화문
2. 홍례문
3. 금천교
4. 유화문
5. 근정문 및 사면무낭
6. 근정전
7. 강녕전
8. 교태전
9. 경회루

Ⅳ. 창덕궁
1. 돈화문(敦化門)
2. 금천교(錦川橋)
3. 인정문(仁政門)
4. 궁전(宮殿)
5. 선정전(宣政殿)
6. 대조전(大造殿)
7. 희정당(熙政堂)
8. 내의원(內醫院)
9. 승화루와 의진각(承華樓와 儀辰閣)
10. 비원(秘苑)
11. 영화당(暎花堂)
12. 불노문(不老門)

Ⅴ. 덕수궁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 조성된 것이며, 창경궁과도 통하였던 곳이다. 1592년 임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소실되고 지금 남아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1623 인조 이후의 역대 제왕에 의하여 개수 증축된 것들이다. 이 비원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원으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 있게 건물들을 배치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왕궁의 후원이다.
11. 영화당(暎花堂)
조선 초기에 세운 것이데, 그 후 숙종 18년에 제 자리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거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공포는 이익공식이며 대청과 퇴간에는 우물 천장을 가설하고 계자 난간을 시설하였다.
12. 불노문(不老門)
영화당의 앞을 지난 반도지(半島池)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자면 중간 지점인 애련지(愛蓮池)에 이르기 전에 문틀 모양의 석문이 하나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이 석문에도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돌쩌귀의 흔적만이 보일 뿐이다.
궁중에서 하나 밖에 없는 석문인 불노문은 세세연년(歲歲年年)이 다하면 할수록 늙어만 가는 심신을 달랠 길이 없어 한없이 가엾게 여기던 상감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만든 석문이라 하여 군주와 불노문에 얽힌 사연과 일화가 적지 않게 전하고 있다.
Ⅴ. 덕수궁
조선 제 9대왕 성종(成宗)의 형님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私邸)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행인 1593년부터 선조대왕(宣祖大王)이 15년간 행궁(行宮)으로 사용하였다. 1623년 인조(仁祖)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다음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후부터 270년간 별궁(別宮)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왕궁으로 사용하였으며 1907년 순종황제(純宗皇帝)에게 양위한 후부터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불렀으며 고종황제는 계속 이 궁에서 거처하시다 1919년 1월 21일 함녕전에서 승하하셨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대한문의 좌우측에 위치한 안내소와 매표소였다. 나가는 쪽에 위치한 안내소는 대한문과 어울리지 않긴 했어도 별다른 해는 미치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매표소. 매표소는 2미터 높이 정도되는 철제 가건물로 대한문 우측 내벽과 10센티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붙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한문의 우측외벽을 보니 매표소의 높이로부터 바닥까지의 아래 부분의 목재들이 바깥족으로 눈에 띄게 휘어져 나와있었다. 반대편의 같은 부분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기에 매표소에 의해서 차게된 습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 의의를 알 수 없는 싸구려 수영장 같은 연못(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수준의) 속의 거북상 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자라들을 구경하다가 흡사 공원같은 잔디밭과 그옆의 전통건물형태의 화장실(가장먼저 보이는 건물이 다름 아닌 화장실이였다.)과 매점을 지나 세종대왕동상을 지나니, 그제서야 고궁다운 웅장한 건물이 보였다. 바로 중화문(中和門)과 중화전(中和殿)이었다. 중화문은 중화전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전각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190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중화전앞 계단을 향하니 대한문 앞에서 보았던 서수들이 보였다. 그리고 계단 복판의 문양은 중화문 앞의 것보다는 훨씬 선명했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으로서 국왕의 즉위식, 공식적인 대례(大禮)를 거행했던 곳이다. 중화전 내부에는 어좌가 있고, 그 뒤에는 오봉산일월도 병풍이 놓여있다. 그리고 천장에는 이룡희주상이 조각되어 있다. 색바랜 문양과 기둥의 글귀들이 고색창연함을 더한다.
중화전의 좌측으로는 덕홍전(德弘殿)과 함녕전(咸寧殿)이 있다.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내빈을 접견할 때 쓰던 건물이다. 나무로 조각된 황금색 봉황기둥과 이화장문양이 보이는데, 그 위쪽의 기둥은 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썩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덕홍전은 화재로 지은 가장 최근(1911년)에 지은 전각이다. 함녕전은 침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덕홍전과 마찬가지로 서양식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데, 덕홍전의 것과는 달리 가장 가운데부분의 덮게가 없어져서 흉한 전선이 다 보인다. 또, 뒤쪽의 문들은 마지막으로 열었던 것이 언제인지 경첩이 녹이슬어 암수가 하나로 달라붙어 다신 열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쪽마루 밑쪽의 나무들은 많건 적건 곰팡이가 슬었있고, 그 마루 밑에서 용도를 알수 없는 DONG SUNG 2라는 완전히 녹이슨 열쇠가 쇠줄로 쪽마루 밑에 고정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옆의 나무기둥에 박혀있는 순찰함이였던 듯한 상자의 흔적으로 보아 과거의 누군가가 편의상 그곳에 둔 것 같다.
그 뒤쪽으로는 즉조당, 석어당(昔御堂)이 있는데 즉조당은 화재로 1904년 준건한 건물인데 그안에서 온돌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바깥에서는 여간해선 보이지 않는 장지문의 한지들은 압정으로 대충 박힌체, 곰팡이가 슬었거나, 너덜너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석어당은 국내 유일의 2층전각이다. 지붕 아래쪽에 자세히보면 보기 흉한 대못이 박혀 있고, 경첩도 녹이 슬어, 열리지 않을듯하고, 각종 쇠장식들도 썩어 문들어 지고 있다.
이 석어당 뒤쪽으로 가면, 화장실과 자판기가 있고, 고궁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닐 천막이 쳐져 있는데, 알고 보니 탈의실이었다. 이는 주말 등을 이용 결혼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중화전 옆에서 전통결혼복장으로 사진찍는 사람들을 실제로 보았다. 그길을 죽따라 왼쪽으로 가면, 산책로와 그에 접한 벤치들을 볼 수가 있는데, 일요일이여선지 소풍나온 가족들이나, 연인들이 꽤나 많았다. 그곳을 지나 중화전의 왼쪽 뒷켠에는 석조전(石造殿)이라는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띄는데, 지금은 궁중유물 전시관으로서 쓰이고 있었다.
참고문헌
신영훈김대벽, 조선의 정궁 경복궁, 조선일보사, 2003
이강근, 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7
이강근, 경복궁, 대원사, 1998
장순용, 빛깔있는 책들 - 창덕궁, 대원사, 1990.
최종덕, 경복궁 복원의 의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3
한영우, 창덕궁과 창경궁, 열화당, 2003
홍순민,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1999

키워드

궁궐,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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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1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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