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미학과 미메시스적 합리성, 아도르노의 예술과 음악, 아도르노예술의 가상과 표현의 관계, 아도르노예술의 현실에 대한 관계, 아도르노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성, 아도르노예술의 지시적 성격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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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도르노의 미학과 미메시스적 합리성, 아도르노의 예술과 음악, 아도르노예술의 가상과 표현의 관계, 아도르노예술의 현실에 대한 관계, 아도르노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성, 아도르노예술의 지시적 성격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아도르노의 미학

Ⅱ. 아도르노의 미메시스적 합리성

Ⅲ. 아도르노의 예술과 음악

Ⅳ. 아도르노예술의 가상과 표현의 관계
1. 미적 가상
2. 표현의 계기

Ⅴ. 아도르노예술의 현실에 대한 관계
1. 죽은 것에의 미메시스
2. 합리적 구성

Ⅵ. 아도르노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성
1. 자율적 예술의 사회적 기능
2. 미적 단자

Ⅶ. 아도르노예술의 지시적 성격

참고문헌

본문내용

면, 긍정은 자체내에 절망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이 아도르노에 있어서는 일차적으로 고통의 표현(AT 84)이며 축적된 고통의 기억(AT 387)이다. 그러한〈고통의 의식〉으로서만 예술은 지금까지 자신과 공범관계에 있던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아직 자신의 존재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명랑한 예술에 대한 아도르노의 공개적인 비판이 근거한다. 명랑한 예술은 모든 종류의 오락과 함께 죽은 자들에 대해 그리고 축적되고 말없는 고통에 대해 일종의 불의를 행한다는 것이다. (AT 66) 그처럼 예술을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진지함의 의미에서 파악하는 아도르노는 예술 특유의 유희적 성격이 부자유와 연합한다고 보는 것이다. (AT 470) 이 점을 감안하여 자기비판적인 예술은 쉴러가 예술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삶의 진지함에 대치시켰던 명랑함을 스스로 포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Vgl. NL 603)
더 나아가 아도르노가 예술에서 고통의 표현을 강조하는 이유는 감각적으로 느끼는 고통의 경험은 단지 구체적으로밖에 묘사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묘사에 예술이 가장 적합한 수단인 이유는 그것이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미메시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예술의 〈미메시스적인 언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통이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기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말로 표현되고 그렇게 하여 자신 속에 갇혀있는 직접적인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취함으로써, 소리를 질러 참기 어려운 아픔을 덜듯이, 그렇게 고통은 변화된다 (AT 178 f.) 고 아도르노가 강조하는 것처럼, 고통이 예술에서 객관화된 표현을 통하여 줄어들지 혹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연관에서 말하고 있듯이 미적인 승화 내지는 양식화는 그 자체가 고통과 잔혹함의 일부를 제거함으로써 희생자들에게 불의를 행하게 된다는 결과를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Vgl. NL 423 f.) 이러한 사실은 휑하게 공허한 눈속에 잠긴 비탄 (NL 605)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예술의 태도 자체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예술존재 Kunstsein라는 것이 원래 삶의 진지함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NL 600) 명랑성과 진지성의 양극화 저편에 있는 예술은 그 때문에 단지 화해의 암호일 뿐이며, 그리고 이 제 3의 것은 아직 덮여 있기 때문에, 진보된 예술작품은 무의 형상들을 기술할 뿐이다. (NL 6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단념할 수 없다. 문제는 다만 예술에서 선취되는 유토피아적 상태가, 생산이 자체목적으로 되는 경향을 보이는 야생적인 사회의 현재상태와 반대로, 그 속에서 행복이라는 것이 맹목적인 노동강제로부터 해방됨으로써 향유될 수 있는 상태로 특징지어진다는 데 있다. (Vgl. AT 108) 비합리적인 자기보존법칙이 지양되면서도 인류가 더 이상 삶의 궁핍을 겪지 않게 될, 충족된 유토피아에서는 영원한 평화가 지배하는 것이다. (Vgl. MM 207 f.) 다른 한편으로 역사 이전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닌 행복은 역사적 노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아도르노는 목표로서 설정된 행복은 합리성의 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성을 수단으로 필요로 한다 (AT 429)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예술이 추구하는 행복의 이념은 예술의 알레고리적 성격과 결부된다. 사회적 실천의 최종목표라고 할 수 있는 행복이 그처럼 (기존의) 사회현실을 넘어서 있는 만큼, 예술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에의 약속 또한 그만큼 이행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행복에의 요구와 행복의 좌절 사이에 낀 예술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맹목적인 자연관계 속에 들어있는 삶에 소송을 거는 예술은 무엇보다 극단적인 부정성으로 인해, 포기할 수 없는 행복에의 약속과 어긋나게, 바로 지금까지 결핍되었기 때문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행복 Desiderat von Gluck을 실현하는 것과 대립되는 것이다. (AT 504) 그 이유는 아마도 또한, 행복의 수난자로서의 프루스트의 경우에서처럼, 행복 전체를 요구하는 대신 삶 전체를 포기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Vgl. NL 675) 따라서 예술은 가상 없는 현재적인 행복,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 아닌 허상이라는 치명적인 유보조건을 가진, 행복의 알레고리다. (AT 197)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아도르노에 있어서 행복이 마치 실현된 것으로 짐짓 꾸며댐으로써 행복을 기만하는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을 근거짓는다. 기존의 것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모든 행복은 대용물이고 거짓이기 때문에, 예술은 약속에 충실하기 위해 약속을 깨뜨려야 한다. (AT 461) 그것은 또한 미적 쾌락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거짓는다. 잘못된 세계에서 누리는 쾌락은 모두 거짓이다. 행복을 위해 행복이 거부된다. 그렇게 하여 예술에서는 욕망 Begehren이 살아남는다. (AT 26) 행복의 완전한 실현이 유토피아적 상태에 유보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삶 속에서 행복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단지 값싼 위안에 불과한 것으로 포기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예술에서 허상에 불과한 행복이 단지 부정적으로만 그리고 굴절되어 나타난다면, 그로부터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이와같이 예술에서 행복에의 약속과 행복의 실현 사이에 풀기 어려운 이율배반과 관련하여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에서의 행복을 (현실 속에서 꿋꿋이) 버티는 느낌 Gefuhl des Standhaltens (AT 31) 이라고 정의한다.
참고문헌
103인의 현대사상, 민음사, 1996
김유동, 아도르노 사상, 문예출판사, 1993
문병호, 아도르노의 사회이론과 예술이론, 문학과 지성사, 1993
테오도르 아도르노, 홍승용 역, 부정변증법, 한길사, 1999
하르트무트 샤이블레, 김유동 역, 아도르노, 한길사, 1997
Th.W, 아도르노·M,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철학적 단상, 문학과 지성사, 2002
T.W, 아도르노, 홍승용 역, 미학 이론, 문학과 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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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07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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