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사(제 1차 대혁명, 2월혁명, 4월 테제, 10월혁명)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논문요약

1. 러시아 혁명의 배경
①러시아의 후진성

2. 혁명의 전개과정
①제 1차 대혁명
②1917년 2월 혁명
③4월 테제
④1917년 10월 혁명

3. 러시아 혁명의 평가

4. 10월 혁명의 부정적 이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 소련은 공산당 정부의 계획과 명령에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되었다
Ⅲ. 러시아 혁명의 평가
혁명 자체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현실적 입지에 따라 극단적 찬반론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학문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볼셰비키라는 소수 음모가들이 꾸며낸 쿠데타로, 역사적으로 피할 수 있었던 불행한 사건으로도, 반면 인류역사 발전에 따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끝내고, 사회주의의문을 열어준 인류사의 필연적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10월 혁명은 무산계급의 정당이 정권획득에 성공한 최초의 역사적 사례로, 후진사회가 취할 수 있는 근대화 경로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서부유럽에 비해 농업이 우세하고, 주민 교육수준이 낮으며, 의회민주주의 바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 위로부터의 산업화와 도시화정책은 속도 면에서 유례 없이 효율적이었다. 적어도 소련이 단기간에 이룩한 외적성과(인민교육 저변확대, 문맹의 해소, 사회보장제도 확립, 국방력 강화)는 자본주의 사회와 많은 차이가 났고, 실질적 평등이라는 면에서도 자본주의 사회보다 우수하다는 판단을 심어줄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경쟁위치에 있던 자본주의 국가 지배층조차 소련의 성과를 인식하고 수정자본주의적 사회 민주주의적 조치를 채택하였다. 즉 사회주의 소련은 자본주의 사회를 상대적으로 인간화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토이카가 난조를 겪다가 결국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는 혁명이후 성립된 사회의 생존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혁명에 대한 평가는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 체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결함은 민주적 의사결정 부재와 인민의 정치적 자유의 박탈이었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 직후의 혼란기를 극복한 후 소련 인민은 최소의 생활 수준의 국가로부터 보장받아 혜택을 누렸지만, 이 사회에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성숙한 시민은 출연하지 못하였다. 이에 가장 큰 이유는 대다수의 민중은 토지 분배에 신경을 집중한 반면 정치적인 자유의 소유 여부에는 관심이 미비했으며, 더욱이 혁명세력은 그런 정치적 미성숙을 이용했을 뿐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Ⅳ. 10월 혁명의 부정적 의의
10월 혁명의 부정적 의의
① 10월 혁명은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을 토대로 삼음으로써 처음부터 사회개조에서 성공할 수 없는 조건을 안고 출발하였다. 즉 19세기 이래 출현한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사상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개조의 방법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계획경제에서 구했으며, 이 제도만 실시하면 그것만으로 자본주의보다 한층 훌륭한 사회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1845∼46년에 쓴 《도이체 이데올로기》에서 ‘만일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사회주의제도를 실시하면, 결핍이 일반화되고, 생존투쟁이 다시 시작되며, 모든 낡은 오물이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강력히 반론하였다. 그런데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만을 형식적으로 바꾸어 놓는 혁명을 레닌이 실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변화의 궁극적 원인을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보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옳다면,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태어난 10월혁명은 가난과 생존투쟁과 구악의 소생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안고 나아가게 마련이었다.
② 10월혁명은 농민에 대해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를 씀으로써 혁명정권은 처음부터 다수자의 지배가 될 수 없는 조건을 안고 출발하였다. 혁명 당시 러시아의 총인구 가운데 농민은 75 %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혁명에서 철저히 대중노선(大衆路線)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불과 10 %의 노동자계급만으로는 혁명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하여 75 %의 농민을 혁명에 이용하기로 결심한 레닌은 마르크스에게는 전혀 없던 노농동맹을 ‘혁명 승리의 불가결의 조건’이라고 강조하면서 토지분배를 미끼로 농민을 혁명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유제 폐지를 주장하는 공산당이 토지의 사유를 뜻하는 토지분배를 약속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속임수였다. 이리하여 1929∼32년에 실시된 농업집단화의 과정에서 약 1000만 명의 농민이 희생되는 대비극은 혁명의 처음부터 운명지워져 있었다.
③ 10월혁명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말살하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를 확립하였다. 임시정부만 타도하면 지체 없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제도를 확립하겠다고 끈질기게 주장·약속해 온 레닌은 정권을 잡은 지 3일 만인 11월 10일 언론을 구속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에 의하여 11월 25일로 예정되었던 선거를 실시한 결과, 총 투표자 3600만 명 가운데 공산당을 지지한 자는 겨우 900만 명뿐, 유권자의 절대 다수가 레닌의 혁명정권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18년 1월 18일에 소집된 제헌의회를 폭력으로 해산시키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에 대하여는 총탄으로 답하는 한편, 독재 즉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 절대로 구속되지 않고 직접 폭력에 입각하는 무제한의 권력’으로써 민주주의와 대치하였다. 이리하여 의회민주주의를 심어보려는 많은 사람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도 훨씬 무자비한 공산당의 독재가 수립되었으며, ‘제헌국회의 죽음은 수난(受難)의 국가와 인민대중에게 새로운 고난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한 M.고리키의 예언은 불행하게도 적중하게 되었다.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에 의하여,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 세워진 무제한의 폭력지배가 장차 나아갈 길은 처음부터 하나의 숙명으로서 마련되어 있었다.
♣ 참 고 문 헌 ♣
* 김진웅 외, 1994, 「서양사 개론」, 학지사
* 박무성, 2002, 「격동의 서양 20세기사」, 한울아카데미
* 신홍민, 1983, 「러시아혁명사」, 한울림
* 쉴라 피츠페트릭, 1990, 「러시아 혁명」, 대왕사
* 빅또르 세르쥬, 1996, 「러시아 혁명의 진실」, 풀무질
* 페리 앤더슨, 1997,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까치글방
* 김학준 , 1999, 「러시아 혁명사 - 수정/증보판」, 문학과 지성사

추천자료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9.08.25
  • 저작시기2009.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035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