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배경, 평안도농민전쟁(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 장흥강진지역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전남지방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의 지향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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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배경, 평안도농민전쟁(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 장흥강진지역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전남지방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의 지향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배경

Ⅲ. 평안도농민전쟁(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
1. 19세기 전반기 농민항쟁
2. 평안도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
3. 이후의 과제

Ⅳ. 장흥강진지역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1. 원인
2. 역사적 의의
3. 결어

Ⅴ. 전남지방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1. 전남지방 동학농민군의 세력 분포와 지도자들
2. 1차 봉기와 집강소시기 전남지방의 상황
3. 2차 봉기시 전남지방에서의 주요 전투

Ⅵ. 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의 지향
1. 경제적 지향
2. 정치적 지향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있는 농민군의 역량을 결집하기위해 이 문제를 일차적으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정문란의 책임을 이전의 민란단계에서는 각 군현단위의 수령, 이서층에 돌리고 있었던데 반해, 이제 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은 동학군 통문에서
성명재상 생민도탄 하자민폐지본 유어이포 이포지근 유어탐관 탐관지소기 유어집권지 탐 의란극칙치 회변칙명 리지상야...(聖明在上 生民塗炭 何者民弊之本 由於吏逋 吏逋之根 有於貪官 貪官之所紀 由於執權之 貪 意亂極則治 晦變則明 理之常也)
즉 민폐의 근본은 이서의 포흠에 있고, 이포(吏逋)는 탐관에 말미암은 것이며, 탐관은 집권자들의 탐람에 있다하여 그 궁극적인 책임을 집권세력에 돌리고 있다. 이전의 민란이나 1894년의 농민전쟁은 같은 봉건적 수취체제의 개혁을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일어난 것이지만, 국지성을 띠는데 그쳤던 민란이 광역에 걸친 농민전쟁으로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농민군 지도자의 의식의 발전에서 가능하였다.
한편 농민전쟁기 농민군의 경제적 지향과 관련하여 토지문제 즉 지주전호제의 폐지문제가 학계의 논쟁점이 되고 있다. 이는 오지영의 <<동학사>> 에 나오는 집강소기 개혁정강 12개조 가운데 들어있는 ‘토지를 평균을 분작케 할 것’이라는 조항의 해석 문제와 관련되어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농민군 가운데 일부가 토지대장을 불태웠으며, 또 가을에 추수가 끝난 뒤 소작료를 내는 것을 거부하는 사례가 대단히 많았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기존의 토지소유관계를 부정하고자 하는 농민군의 의식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자기 토지를 전혀 가지지 못한 혹은 영세한 토지 밖에 가지지 못한 빈농층의 토지소유욕구, 즉 농민층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빈농층이 자기 토지의 소유를 통하여 우선 경제적 자립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렇게 분출되었던 것이다. 농민군의 토지문제에 대한 지향과 관련하여 전봉준이 토지제도에 관한 언급을 하였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어떠한 토지제도개혁구상을 갖고있었는지는 알 수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강위가
수불원행균전자 기불원자 특거성대족 급향리호골지민이연 금지시거성대족호민지세 부족이승소민지중...(誰不願行均田者 其不願者 特巨姓大族 及鄕里豪골之民耳然 今之時巨姓大族豪民之勢 不足以勝小民之衆)
즉 “균전은 모든 소민들의 바램”이라고 말했던 바의 ‘균전’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전봉준이나 농민군들이 토지문제와 관련하여 그러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집강소시기는 이를 개혁조항으로 넣어 추진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관민상화에 의해 이루어진 집강소 시기에 이와같은 근본적인 개혁을 실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러한 수준의 개혁은 농민군의 지휘체계상으로도 아직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농민군의 내부구성이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져 토지문제의 개혁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이루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1894년 농민전쟁의 진행과정에서 농민군이 제기할 수 있었고, 또 현실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경제측면에서의 개혁은 조세문제가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2. 정치적 지향
농민군이 1차 봉기에서 민씨 정권의 축출을, 2차 봉기에서 일본침략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정치적 지향에 관해서는 특히 농민군이 대원군세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농민군은 4월 16일 영광에서 발표된 통문에서 “우리가 오늘 의거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국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하게 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존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호하며, 이로써 부자의 천륜과 군신의 대의를 온전히 하여 난신적자가 자연히 사라지게 함”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농민군은 국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면서 대원군의 정권장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5월 4일 전주에서 초토사에게 보낸 글에서 “국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맡기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늘 어찌 불궤라 하느냐”고 비난하였다. 대원군과 전봉준간에 사전에 어떤 연락관계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를 통해서 적어도 1차봉기 당시에는 농민군측이 대원군을 다시 옹립하면서 대원군과 농민군세력의 연합정권 성립을 구상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면 2차 봉기시 농민군과 대원군은 어떤 연락관계를 갖고 있었을까. 전봉준은 재판과정에서 대원군과의 관련성을 완강히 부정하였다. 그리고 신문과정에서 2차 봉기가 대원군의 사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해 “재기한 일은 우리들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며, 비록 대원군이 해산을 종용하는 효유문을 내렸다고 해도 이를 깊이 믿을 수없어 힘써 재기를 도모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비록 전봉준이 대원군의 밀사에 의해 경성의 사정을 알게 되어 봉기를 서두른 것은 사실이지만, 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비로써 봉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Ⅶ. 결론
19세기 말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급격한 사회변동과 이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농민저항이 격렬하게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수만 명의 농민들이 죽어간 1894년 농민전쟁은 역사 속을 헤는 이들의 관심을 비켜 갈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자본과 그 문화의 소비자 지위만을 누리도록 조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인간적인 삶이며,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다양한 형태의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고민과 실천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사회를 비판하고, 그 전망을 찾는 준거를 마련하리라 믿는다.
참고문헌
김용섭(1992), 봉건사회 최말기의 농민운동과 그 지향,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오길보(1959), 갑오농민전쟁과 동학, 역사과학 3
장두환(1992),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조경달(1982), 동학농민운동과 갑오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 조선사연구회론문집 19
정석종(1972), 홍경래난의 성격, 한국사연구 7집, 한국사연구회
정진각(1978), 동학농민전쟁의 성격, 한양대 석사학위논문
한우근(1984), 동학혁명의 성격, 경희대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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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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