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지역의 항일무장투쟁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만주지역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목 차 §

Ⅰ. 머리말


Ⅱ.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1.한인동포의 만주지역 이주와 정착

2. 독립군의 결성

3. 지역별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1) 北間島지방
(2)西間島 지방
(3) 北滿洲 密山 지방

4. 항일무장전쟁
(1) 鳳梧洞戰鬪와 日帝의 間島出兵
(2) 靑山里戰爭


Ⅲ. 맺음말


※ 참고자료

본문내용

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택해 공격하는 독립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일군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전투 개시 3시간만에 퇴각하기에 이른다. 이 때 독립군 2중대는 도주하는 일군을 추격하여 완전 섬멸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것이 독립군 전사에 길이 빛나는 봉오동전투이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전투에서의 독립군측의 전과를 일본군 사살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명으로, 반면에 독립군측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에 불과한 것으로 발표했다.
(2) 靑山里戰爭
1920년 10월 간도출병을 단행한 일제는 일본군 제19사단을 주력으로 본격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 측은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작전을 사전에 감지하고 미리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대한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국민군 등 독립군 제부대들은 1920년 8월 하순부터 각기 백두산 서쪽 험준한 밀림지대로의 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 독립군 부대가 이동을 결정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이다.
첫째 백두산 부근은 근접지역이므로 향후 국내진입작전 수행을 위해 유리한 곳이라는 점이다. 이는 새로운 항전기지로는 언제든 국경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펼치기 용이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지역이 적합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결정은 일제를 우리 땅 한반도로부터 축출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던 독립군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둘째 백두산 일대는 산세가 험준하고 산림이 우거져 일본군과의 전투시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중일의 통치 영향력이 미치기 어려운 오지이므로 새로운 항전기지를 구축하는데도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백두산은 중국 奉天省과 吉林省의 접경지대이므로 중국군의 탄압을 피하기 용이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즉 이곳에다 근거지를 구축하게 되면 일제의 강요를 받은 길림성 군대가 공격해 올 경우 봉천성으로, 봉천성 군대가 공격해 올 경우 길림성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잇점 때문이었다.
넷재 백두산 부근은 한인들이 일찍부터 정착하면서 촌락을 형성하고 있어 독립군부대들이 인적 물적 지원을 최소한이나마 받을 수 있는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 같은 이유에서 연길·혼춘·왕청·화룡현 등 북간도에 근거지를 두었던 독립군들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필두로 새로운 근거지로의 대이동을 개시하였다.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 가운데 가장 늦게 장정에 오른 부대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였다.
청산리전쟁의 최초 전투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가 1920년 10월 21일 에 대승한 백운평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대한군정서군은 일본군 전위부대 200여명을 전원 섬멸하는 전과를 거뒀다.
두 번째 전투는 1920년 10월 22일 새벽에 벌어진 완루구전투였다. 홍범도 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루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 전투는 일본군 400여명을 사살해서 전멸시켰다.
청산리전쟁의 세 번째 전투는 대한군정서의 연성대가 중심이 되어 10월 22일 새벽에 기습적으로 펼친 천수평전투이다. 이범석이 지휘하는 연성대가 전위공격대를 앞세워 일본을 기습하여 일군 기병 제 27연대 소속 전초기병중대 110여명을 전원 섬멸하였다.
네 번째 전투는 청산리전쟁 중 최대 격전이었던 어랑촌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대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는 합동작전을 펼쳐 청산리전쟁 중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다.
최대 격전을 펼쳤던 어랑촌전투에서의 대승 이후 독립군들은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를 펼쳐 승리하였다.
이처럼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 동안 연속적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독립군 연합부대와 일본군간에 치러진 청산리전쟁은 항일독립군 연합부대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렇게 대승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요인과 교훈이 몇 가지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있다.
우선 항일독립전쟁을 위해서는 무장력과 전투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해야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투쟁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효과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해서는 독립군부대의 통합군단으로의 체계화 일원화가 절실히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Ⅲ. 맺음말
이러한 독립운동단체들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만주지역의 제반조건이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정리해보면 첫째 무기구입 통로와 군자금 확보에 의한 독립군단체들의 무장력제고이고, 둘째 3·1운동 전후 이주한인의 급증에 의한 독립군의 인적자원의 확대, 셋째 한만 의병항쟁부터 오랜 기간 실전 경험을 쌓은 인적자원의 확보 등을 기반했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것이다.
항일무장독립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일제 군경의 삼엄한 경계와 중국 현지 관원의 간섭과 통제 등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따라서 국내 진입작전은 만주 한인사회의 오랜 염원이었던 본토 수복을 위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진공작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향후 무장투쟁에 자신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항일무장투쟁사랑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결과물인 만주 각 지역의 한인 자치기구와 독립운동단체들은 국내의 3·1운동 발발을 즈음해 대한군정서·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 등 수많은 독립군부대를 결성해 본격적인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의 항일무장투쟁은 항일독립투쟁에 있어서의 새로운 장을 열었음과 동시에 한민족독립운동사의 확고한 기반으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존재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 참고자료
김봉렬, 『海外 韓人社會의 抗日獨立運動基地 건설』, 2004, 경남대학교
김봉렬, 『1920년 滿洲地域 抗日武裝鬪爭의 推移』, 2005, 경남대학교
§ 목 차 §
Ⅰ. 머리말
Ⅱ.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1.한인동포의 만주지역 이주와 정착
2. 독립군의 결성
3. 지역별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1) 北間島지방
(2)西間島 지방
(3) 北滿洲 密山 지방
4. 항일무장전쟁
(1) 鳳梧洞戰鬪와 日帝의 間島出兵
(2) 靑山里戰爭
Ⅲ. 맺음말
※ 참고자료
  • 가격3,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11.25
  • 저작시기2009.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305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