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기
2. 서유럽의 봉건 사회와 경제
-봉건제
-중세의 기사
1) 기사도
2) 신의 휴전
-[사료] 신의 휴전
-귀족 여성의 지위
-장원제
1) 장원의 구성
2) 장원의 중심 : 영주의 성
3) 장원의 생산자: 농노의 삶과 생활 모습
4) 장원제의 새로운 시각
-[사료] 장원의 사계
-TIP. 중세 농민의 삶과 교회
-중세 농업(전기)
1) 중세 농업의 특징-생산력의 부족
2) 경작방법
① 공동경작, 개방경작
② 휴경지의 존재-2포제
3. 참고문헌
2. 서유럽의 봉건 사회와 경제
-봉건제
-중세의 기사
1) 기사도
2) 신의 휴전
-[사료] 신의 휴전
-귀족 여성의 지위
-장원제
1) 장원의 구성
2) 장원의 중심 : 영주의 성
3) 장원의 생산자: 농노의 삶과 생활 모습
4) 장원제의 새로운 시각
-[사료] 장원의 사계
-TIP. 중세 농민의 삶과 교회
-중세 농업(전기)
1) 중세 농업의 특징-생산력의 부족
2) 경작방법
① 공동경작, 개방경작
② 휴경지의 존재-2포제
3.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동, 게르만 왕국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중세 전기 농업과 수공업 분야는 로마 전성기보다 퇴보하였다. 정치상황으로 인해 봉건제가 성립될 무렵 광대한 유럽의 토지에 비해 인구는 희박한 상태였다.
1) 중세 농업의 특징-생산력의 부족
중세 농업은 오늘날에 비해 수확량에 있어서나 단위 파종량당 수확량에 있어서나 그 수준이 매우 낮았다. 낮은 수확량은, 수확된 곡물이 주식인 빵의 원료일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가장 대중적인 술의 원료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특히 심각한 문제였다. 영국에서는 수확된 곡물이 빵과 맥주에 대체로 반반씩 소비되었다. 따라서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경작이 가능한 모든 땅에 곡물을 심어야 했다. 하지만 사료인 질좋은 건초를 기르기 위해서도 곡물을 기르는 땅 못지않게 기름진 땅이 필요하였고, 북유럽 전역에서는 긴 겨울철 동안 가축을 먹여 살려야 할 필요까지 있었다. 그 결과, 건초 부족의 문제는 악순환에 빠졌다. 밭을 경작하려면, 쟁기를 끄는 소들을 먹여야 했고, 4-8마리의 소가 먹어치우는 건초의 양은 막대한 것이었다. 건초의 부족으로 겨울철에 먹여 살릴 수 있는 가축의 수는 밭가는 소들을 제외하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쓸 수 있는 분뇨의 양 또한 제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료 부족 외에, 파종 시 언제나 씨를 심는 것이 아니라 흩뿌렸기 때문에 새들이 먹어치우는 씨앗이 많았을 것을 감안한다면, 수확량이 낮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 경작방법
① 공동경작, 개방경작
북유럽에서는 보통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종종 과도하게 내리는 여름 빗물을 빼기 위해 두둑과 고랑으로 이루어진 이랑의 형태가 바람직하였다. 게르만 정착자들의 무겁고 크며 땅을 깊이 갈아주는 쟁기는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거운 쟁기를 끌기 위해서는 4-8마리의 소가 조를 이루어야 했다. 따라서 이 쟁기는 방향을 바꾸기가 극히 곤란하였으며, 북유럽 농업의 특징이었던 길쭉한 지조(地條:strip)는 방향 전환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쟁기를 끌기 위한 소들을 기르기 위해 공동경작은 보편화되었다.
요컨대 농민의 경제적인 자원은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그 자신의 집뜰 및 경작지의 지조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촌락의 공동 재산이었다. 촌락은 기본적으로 농업 협동체였다. 촌락민은 함께 땅을 갈았고, 함께 추수하였으며, 함께 탈곡하였다. 개방경지의 길쭉한 지조는 개인의 독자적인 경작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하였다. 다른 사람이 울타리도 없이 바로 연이어 있는 이랑에 가축을 방목시키고 있는데, 혼자서만 씨를 뿌릴 수는 없었다. 방목지와 숲은 촌락민의 동의로 확립된 규제 하에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촌락에서 임명한 가축지기(herdsman)는 자기의 가축과 함께 이웃들의 가축도 돌보았다.
② 휴경지의 존재-2포제
중세 농민들은 보편적으로 비료의 부족에 직면해 있었다. 땅에 질소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작물 돌려짓기(crop rotation)’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비료는 동물의 분뇨였고, 휴경없이 경작하면서 지력을 유지하기에는 분뇨가 태부족이었다. 중세인이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해결책은 땅을 주기적으로 ‘쉬게’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미 북유럽에서나 남유럽에서나 매번 번갈아 가며 경작지의 반만이 경작되고 나머지 반은 휴경되었던 것이다.
수확이 보다 많은 삼포식 경작은 이러한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고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개간이 이루어졌다.
3. 참고문헌
김성환, 교실밖 세계사여행, 사계절, 2003.
만프레트 마이, 유럽의 역사, 웅진지식하우스, 2008.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1, 중앙M&B, 2004.
베니야마, 유럽에 빠지는 즐거운 유혹, 스타북스, 2007.
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중세사연구, 탐구당, 1987.
아일린 파워, 중세의 사람들, 이산, 2007.
윌리엄 맥닐, 세계의 역사, 이산, 2007.
윌리엄 맥닐존 맥닐, 휴먼웹-세계화의 세계사, 이산, 2007.
장-바티스트 뒤로젤, 유럽의 탄생, 지식의 풍경, 2003.
정기문, 한국인을 위한 서양사, 푸른역사, 2007.
조르쥬 뒤비, 천년 그 세기말의 징후, 교보문고, 1999.
조셉 폰타나, 거울에 비친 유럽, 새물결, 2000.
진원숙, 서양사이야기1, 신서원, 2003.
프리드리히 헤르, 중세의 세계, 현대지성사 1997.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의 빛과 그림자, 까치, 2001.
1) 중세 농업의 특징-생산력의 부족
중세 농업은 오늘날에 비해 수확량에 있어서나 단위 파종량당 수확량에 있어서나 그 수준이 매우 낮았다. 낮은 수확량은, 수확된 곡물이 주식인 빵의 원료일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가장 대중적인 술의 원료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특히 심각한 문제였다. 영국에서는 수확된 곡물이 빵과 맥주에 대체로 반반씩 소비되었다. 따라서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경작이 가능한 모든 땅에 곡물을 심어야 했다. 하지만 사료인 질좋은 건초를 기르기 위해서도 곡물을 기르는 땅 못지않게 기름진 땅이 필요하였고, 북유럽 전역에서는 긴 겨울철 동안 가축을 먹여 살려야 할 필요까지 있었다. 그 결과, 건초 부족의 문제는 악순환에 빠졌다. 밭을 경작하려면, 쟁기를 끄는 소들을 먹여야 했고, 4-8마리의 소가 먹어치우는 건초의 양은 막대한 것이었다. 건초의 부족으로 겨울철에 먹여 살릴 수 있는 가축의 수는 밭가는 소들을 제외하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쓸 수 있는 분뇨의 양 또한 제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료 부족 외에, 파종 시 언제나 씨를 심는 것이 아니라 흩뿌렸기 때문에 새들이 먹어치우는 씨앗이 많았을 것을 감안한다면, 수확량이 낮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 경작방법
① 공동경작, 개방경작
북유럽에서는 보통 여름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종종 과도하게 내리는 여름 빗물을 빼기 위해 두둑과 고랑으로 이루어진 이랑의 형태가 바람직하였다. 게르만 정착자들의 무겁고 크며 땅을 깊이 갈아주는 쟁기는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거운 쟁기를 끌기 위해서는 4-8마리의 소가 조를 이루어야 했다. 따라서 이 쟁기는 방향을 바꾸기가 극히 곤란하였으며, 북유럽 농업의 특징이었던 길쭉한 지조(地條:strip)는 방향 전환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쟁기를 끌기 위한 소들을 기르기 위해 공동경작은 보편화되었다.
요컨대 농민의 경제적인 자원은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그 자신의 집뜰 및 경작지의 지조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촌락의 공동 재산이었다. 촌락은 기본적으로 농업 협동체였다. 촌락민은 함께 땅을 갈았고, 함께 추수하였으며, 함께 탈곡하였다. 개방경지의 길쭉한 지조는 개인의 독자적인 경작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하였다. 다른 사람이 울타리도 없이 바로 연이어 있는 이랑에 가축을 방목시키고 있는데, 혼자서만 씨를 뿌릴 수는 없었다. 방목지와 숲은 촌락민의 동의로 확립된 규제 하에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촌락에서 임명한 가축지기(herdsman)는 자기의 가축과 함께 이웃들의 가축도 돌보았다.
② 휴경지의 존재-2포제
중세 농민들은 보편적으로 비료의 부족에 직면해 있었다. 땅에 질소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작물 돌려짓기(crop rotation)’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비료는 동물의 분뇨였고, 휴경없이 경작하면서 지력을 유지하기에는 분뇨가 태부족이었다. 중세인이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해결책은 땅을 주기적으로 ‘쉬게’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미 북유럽에서나 남유럽에서나 매번 번갈아 가며 경작지의 반만이 경작되고 나머지 반은 휴경되었던 것이다.
수확이 보다 많은 삼포식 경작은 이러한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고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개간이 이루어졌다.
3. 참고문헌
김성환, 교실밖 세계사여행, 사계절, 2003.
만프레트 마이, 유럽의 역사, 웅진지식하우스, 2008.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1, 중앙M&B, 2004.
베니야마, 유럽에 빠지는 즐거운 유혹, 스타북스, 2007.
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중세사연구, 탐구당, 1987.
아일린 파워, 중세의 사람들, 이산, 2007.
윌리엄 맥닐, 세계의 역사, 이산, 2007.
윌리엄 맥닐존 맥닐, 휴먼웹-세계화의 세계사, 이산, 2007.
장-바티스트 뒤로젤, 유럽의 탄생, 지식의 풍경, 2003.
정기문, 한국인을 위한 서양사, 푸른역사, 2007.
조르쥬 뒤비, 천년 그 세기말의 징후, 교보문고, 1999.
조셉 폰타나, 거울에 비친 유럽, 새물결, 2000.
진원숙, 서양사이야기1, 신서원, 2003.
프리드리히 헤르, 중세의 세계, 현대지성사 1997.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의 빛과 그림자, 까치,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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