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김일성
●생애
●김일성의 성격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논란
●생애
●김일성의 성격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논란
본문내용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 3·1운동을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의 서울 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기술해왔다. 그러나 1980년부터는 평양 장대제에 있던 숭덕여학교에서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북한 선전매체는 "이 날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울린 종소리를 신호로 김형직이 몸소 육성한 애국적인 청년학생과 인민을 선두로 10여만 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는 1917년 김형직이 결성한 '조선국민회'가 3·1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유관순 열사의 항일운동도 김형직이 지도한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심지어 3·1운동 당시 김일성이 7살의 어린 나이에 만경대에서부터 평양성까지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북한 정권이 김일성뿐 아니라 항일 역사와 전혀 관계 없는 김일성의 아버지, 할아버지 등도 항일 투사의 전형으로 묘사하며 이들에 대한 가계 우상화물을 북한 곳곳에 설치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형직을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킨 선구자'로 칭송하며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인민병원 등의 칭호를 붙였으며 양강도 북쪽에는 '김형직군(郡)', 그의 숙부 이름을 딴 '김형권군'(郡)까지 설치됐다
5. 보천보 전투 논란
북조선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지난 50여년 동안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중요한 선전 자료로 이용해 왔다. 북조선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하였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이 교시했다는 연설문도 싣고 있다. 김일성 및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 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하여 보천보를 습격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조선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김일성 부대)의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되어 왔다. 김일성 부대는 보천보 전투 이후 1938년 말부터 일제 토벌대에 추격당해 장백현으로 이동했다. 1938년 12월~1939년 3월 사이 100일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몽강현으로부터 압록강 연안 북부 국경일대를 향해 이동하게 된다.
북조선은 당시 김일성 부대가 일제 군경의 포위와 극심한 식량난,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등 헤아릴 수 없는 지독한 난관을 물리치고 행군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뉴라이트에 의하면 일제 때 있었던 '고난의 행군'은 북조선당국의 명백한 경제실정으로 인한 대아사 사태와 식량난을 호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민들로 하여금 현재의 경제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당연시 하도록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6. 한국전쟁 배후 논란
6.25 전쟁의 주동자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의 주동자 설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주동자는 아니며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이 배후조종했다는 주장, 미국이 고의로 1949년 미군을 철수하여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도 있다.
대한민국은 북한 정권이 김일성뿐 아니라 항일 역사와 전혀 관계 없는 김일성의 아버지, 할아버지 등도 항일 투사의 전형으로 묘사하며 이들에 대한 가계 우상화물을 북한 곳곳에 설치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형직을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킨 선구자'로 칭송하며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인민병원 등의 칭호를 붙였으며 양강도 북쪽에는 '김형직군(郡)', 그의 숙부 이름을 딴 '김형권군'(郡)까지 설치됐다
5. 보천보 전투 논란
북조선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지난 50여년 동안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중요한 선전 자료로 이용해 왔다. 북조선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하였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이 교시했다는 연설문도 싣고 있다. 김일성 및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 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하여 보천보를 습격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조선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김일성 부대)의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되어 왔다. 김일성 부대는 보천보 전투 이후 1938년 말부터 일제 토벌대에 추격당해 장백현으로 이동했다. 1938년 12월~1939년 3월 사이 100일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몽강현으로부터 압록강 연안 북부 국경일대를 향해 이동하게 된다.
북조선은 당시 김일성 부대가 일제 군경의 포위와 극심한 식량난,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등 헤아릴 수 없는 지독한 난관을 물리치고 행군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뉴라이트에 의하면 일제 때 있었던 '고난의 행군'은 북조선당국의 명백한 경제실정으로 인한 대아사 사태와 식량난을 호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민들로 하여금 현재의 경제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당연시 하도록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6. 한국전쟁 배후 논란
6.25 전쟁의 주동자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의 주동자 설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주동자는 아니며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이 배후조종했다는 주장, 미국이 고의로 1949년 미군을 철수하여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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