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당에 대한 정의와 역사 전반적인 개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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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와당에 대한 정의와 역사 전반적인 개념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와당이란 무엇인가?

와당의 목적과 기원

기와란 무엇인가?

시대별 와당의 변천사

처마 끝의 신비로움, 와당

본문내용

는데 당대 최고의 조형예술을 대표하는 것이다.
생동하는 힘과 온화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이 서로 어울려 과히 신공(神工)의 재주를 다하였다. 우리는 백제 산수화의 높은 경지를 이 산경문전에서 볼 수 있으며 백제인의 해학적 여유를 귀면문에서 볼 수 있다. 비운문( 飛雲紋)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구름의 요동이며 그 한정된 원의 공간 속에서 무한히 창공을 나르는 것 같은 생동하는 봉황문의 구도는 백제인의 높은 회화적 구상을 엿보게 한다. 신라는 통일신라 이후에 문양전을 만들었는데 이는 보상화문이 기본형이며 기하학적이고 도식적이어서 백제의 저 자유로운 구상을 따르지 못하였다.
신라의 와당
신라의 와당은 화려한 것이 특징인데, 초기에는 단순한 연꽃무늬의 와당이 많았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연판이 이중으로 겹쳐지면서 매우 아름답게 처리된다. 그 문양도 다양하게 발전하여 연판무늬를 비롯하여 초화(草花), 인동(忍冬), 도깨비, 사자(獅子), 보상화(寶相花), 사람얼굴무늬 등이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와당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귀면문 수막새와 귀면문 암막새가 꾸준히 제작되는 가운데 건물의 내림마루와 귀마루 끝에 부착하는 귀면와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귀면와가 대량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형태와 구도면에서도 완벽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특히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에 제작된 귀면와들은 모든 면에서 절정을 보여주는데, 마루용으로 제작된 귀면와의 경우 안면이 크게 표현되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강한 볼륨감으로 충만해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로 갈수록 양감이 약화되고 문양 표현에 보이는 섬세함의 정도가 떨어지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무기력화 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낙랑와당
수막새기와에 무늬나 글자를 넣은 두 가지가 있다. 수막새의 테가 두꺼우며 가운데 원형(圓形)을 중심으로 4구로 나누고 그 구역 안에 고사리무늬나 글자를 새겼다.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천추만세(千秋萬歲)' '대진원강(大晋元康)' 등 전자(篆字)로 양각(陽刻)한 것이 있고, 구름의 변형이나 꽃잎과 고사리 같은 무늬를 배치한 것도 있다. 이 기와는 기본적으로 한(漢)나라 기와를 모방한 것이며 한반도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기와이다.
고려와당
귀목문은 태양문에서 변형된 형태의 문양으로, 귀신 눈 모양의 독특한 무늬로, 도깨비의 눈 같기도 하고 밝게 빛나는 태양 같은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 외곽에 한 줄 혹은 두 줄의 원호를 두르고 내부에 눈동자 문양의 반구형 요철을 나타낸 형태를 하고 있는데, 연화문이나 당초문 같은 식물문에서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 대신 추상적 문양을 넣음으로써 질병과 재난 등의 피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같은 의미의 귀면문보다 제작과정이 훨씬 단순하고 쉬워 널리 유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다양한 막새무늬에 비하여 가짓수도 적어지고 조각 수법도 퇴화하였다.
수막새의 무늬는 연화무늬가 주류를 이루며, 귀면(鬼面)무늬·동물무늬·봉황무늬도 있으나 박진감이 없고 힘이 빠진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나는 유행은 모란무늬 같은 꽃무늬이며, 수막새에는 외눈박이, 암막새에는 쌍눈박이 무늬가 특이하다. 고려의 암막새 기와는 당초문이 주류를 이루며 드림새가 커져서 투박하게 보인다. 수막새나 암막새를 불구하고 갓테에 주연(周緣)을 돌리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화려한 청자기와를 만들었으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막새의
드림새가 직각으로 부착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와당
조선시대에는 암/수키와와 막새, 취두/용두/잡상/망새 등의 마루기와 그리고 사래나 추녀에 사용되는 토수 등이 제작되었는데 이 중 망새를 제외한 마루기와와 토수 등은 궁전 건축이나 관아 건물에만 사용되었다. 일반 건축에 사용된 기와는 암/수키와, 막새 그리고 마루에 사용되는 망새로 한정되었으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사용범위가 민가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조선시대의 기와는 기능성이 강조된 반면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약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암막새는 전체적인 모양이 좌우에 굴곡이 있는 삼각형을 이루며, 수막새는 밑이 처져 하트 모양 혹은 계란 모양이 된다. 막새의 무늬로는 연꽃, 초화, 새, 도깨비, 사람 얼굴, 용, 봉화 등이 이용되었으며 ‘수(壽)’, ‘복(福)’ 등의 문자도 새겨졌다. 특히 다양한 형상으로 표현된 사람 얼굴은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운 느낌을 자아내어 조선시대 기와의 한 가지 특징을 이룬다. 또한 막새면에 여러 줄의 세로선을 그은 다음 그 사이의 공간에 연호나 인명 등을 양각한 막새도 유행하였다.
연화문 와당
와당은 기와의 마구리로, 막새라고도 한다. 수막새·암막새 등이 있는데, 기와 한쪽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을 일컫는다. 암키와에 붙이는 막새가 암막새, 수키와에 붙이는 막새가 수막새이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사용하는 기와나 막새에는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을 하는데, 연화문와당은 막새에 연꽃 무늬를 새긴 와당(막새)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연화문을 넣은 막새를 많이 제작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주로 연꽃 무늬를 새긴 파와(巴瓦)를 많이 만들어 궁궐 등의 지붕에 사용하였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의 고구려 석릉(石陵)인 장군총(將軍塚)에서 나온 연화문와당의 경우, 테두리가 두껍고 중앙 원형에서 2개의 선을 여덟 방향으로 그린 뒤, 그 사이에 연꽃 무늬를 새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와당은 그동안 북한 지역에서만 출토되었을 뿐, 남한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았는데, 2004년 서울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峨嵯山) 고구려 유적지에서 6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연화문와당 3점이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백제의 와당도 역시 연화문의 파와가 많지만, 고구려의 것보다 테두리가 넓다. 통일신라 때도 연화문을 비롯해 다양한 무늬의 와당이 제작되었고, 조선시대까지도 연화문와당은 계속 만들어졌다.
백제 때의 것으로는 충청남도계룡산신원사(新元寺)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는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있는 지름 18㎝의 연화문와당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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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23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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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93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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