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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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배경

각계에서도 삼일 운동

그리스도교

학생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해외)

미주

일본

삼일운동과 그 전개 과정

3․1운동의 경과

3․1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의 광주지역은 어떠하였을까?

본문내용

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예수교인들도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양측은 서로 연락하여 시위 날짜를 4월 8일로 정하였다. 4월 8일 오전 10시 시내 곳곳에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예수교인들이 남녀 학생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 시위를 하였다. 당황한 일본 경찰과 헌병은 칼을 마구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남교동 시장 일대에서는 시위 대열의 앞에 있던 사람이 칼에 맞아 피를 흘리는 등 격렬해졌다. 예수교 신앙인 부녀자들도 만세 시위 중에 구속되는 등 80여 명이 구속되어 40여 명이 형을 받았다. 시위 중 부상으로 치료를 받다가 죽거나, 심한 고문을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죽기도 했다.
해남읍에서는 4월 6일 장날, 장꾼들이 많이 모인 1시쯤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1,000명이 넘는 시위 군중이 시가를 행진하며 목이 터져라고 만세를 부르자, 헌병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하고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4월 11일에도 청년들이 만세 시위를 시작해서 장꾼들과 시민들이 합세하였고,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가하여 시위 군중이 1,000명을 넘었다. 삼산면, 우수영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무안에서는 3월 18일 장산도의 유지 30여 명이 독립 경축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민족 자결주의와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만세 시위를 하였다. 3월 20일에는 무안읍 장터에서 110여 명이 먼저 조국의 독립을 경축하는 만세 시위를 가지자 군중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해산하고 57명을 연행했다.
완도에서는 3월 15일에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인들 수백 명이 읍내에 모여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 이에 일반 군중들도 환호성을 울리며 성원하여 읍내는 마치 독립 경축의 광장이 된 듯하였다. 진도에서도 3월 25일과 4월 1일에 만세 시위가 있었다.
영암에서는 3월 11일 장날에 만세 시위를 하려고 하였으나 너무 감시가 심하였다. 그래서 4월 10일 영암읍과 군서면 구림리에서 동시에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추진하였다. 10일 오전 9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회사정 광장으로 모였다.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읍내 중심가로 행진하니 참가자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같은 날에 구림 보통학교 교정에서도 비상 나팔을 불며 3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면사무소와 학교를 왕래하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의 시위로 학생 30여 명이 구속되어 그 중 20여 명이 옥고를 치렀다.
강진에서는 천도교에서 독립 선언서를 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예수교에서도 예배를 통하여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3월 20일 동경 유학생과 청년들이 만세 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3월 25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정했으나 준비가 안되어 다음 장날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비밀이 탄로되어 주동자가 검거되었다. 4월 4일 그들은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군청 뒷산 마루에 태극기를 높이 세웠다. 청년들이 일제히 시장으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1,000여 명의 장꾼들도 이에 호응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 강진 보통학교 학생 60여 명도 점심 시간에 교문을 뛰쳐나와 만세 시위에 합류하였다.
장흥은 동학농민전쟁 때 최후의 항전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천도교 세력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 조직을 통해 각 면의 책임자를 선정하여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15일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장 중앙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어 신호하였다. 삽시간에 수백 명의 군중들이 모여서 대열을 지어 만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하였다. 그 위세에 경찰이나 헌병들도 함부로 대들지 못하였다. 어두워지면서 자진 해산하였으나 검거 바람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었다. 3월 20일 대덕에서 수백 명이 시위하였고, 4월 초 이웃 여러 지역에서도 시위 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여수, 순천과 이웃에서도 3·1운동은 일어났다.
여수에서는 청년 회원들과 수산학교 학생들이 장날 만세 시위를 하기로 하였으나, 이 사실이 누설되어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인근의 쌍봉, 소라, 율촌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어선들도 태극기를 달고 일본 어부들을 위협하였다.
순천에는 3월 2일에 동학 조직을 통해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독립 선언서가 전달되었다. 3월 16일 2시쯤 순천읍 예수교 청년 회원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들에 의해 해산되었다. 장날인 4월 7일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낙안에서는 애국 청년들이 모여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글을 일본의 내각과 총독부에 보내고 일진회의 반역 행위를 성토했다.
고흥에서는 거사일로 잡았던 3월 14일 억수로 쏟아진 비 때문에 만세 시위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흥 각 지역에서 시위를 하였고, 특히 해상에서는 배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 시위를 하였다.
곡성에서는 3월 29일 학생들 수십 명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5일 옥과에서 만세 시위와 산봉우리 봉화 시위가 있었다. 4월 4일 남원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사망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몰려가다가 경찰의 저지를 받기도 했다.
구례에서는 남원의 천도교 교구장에게서 독립 선언서를 전달받아 각지의 천도교인들에게 배포하고 독립 운동에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3월 24일 구례읍 장날에 만세를 불렀다. 3월 31일 읍내에서 산발적인 만세 시위가 있었다. 4월 초 구례 군수의 친일 행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벽보가 붙어 일제 침략자와 그 앞잡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광양에서는 3월 27일 장날에 만세를 불렀고, 4월 4일 장날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에 일제는 총칼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4월 5일 옥룡면의 서당에서 글을 읽던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읍으로 달려가다가 검거되었고, 4월 15일 진월면 선소리에서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미리 알고 온 헌병들에게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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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24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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