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까지 나가야할 사도들의 사명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 서론 -

1. 그리스도교의 유대적 배경

2. 최초의 교회

3. 이방인 교회

4. 땅 끝까지

5. 기독교회의 이방 진출

본문내용

60년에 죄수로서 로마에 호송되었으며 A.D. 63년에 풀려났으나 A.D. 66년에 다시 체포되어 유명한 네로 황제의 박해 시 A.D. 67년에 순교 당했다. A.D. 60-63년 로마에서 연금된 생활을 할 때 그는 개인 집에서 살도록 허용되었다. 그때 거기서 로마서를 썼다. 오랜 영어(囹圄)의 생활 끝에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 바울은 로마 제국에 기독교적 영향을 끼친 사람임을 묵과할 수 없을 것이다.
② 바울의 세계 교회에 대한 기여 중 지대한 것은 그가 기록한 서신들이었다. 대체로 그 내용을 말하면 신자의 신앙과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신앙은 구원에 관한 교훈이요, 생활은 구원 받은 자의 행위이다. 바울 서신 중 로마서는 1-11장까지는 구원의 교리편이요, 12-16장까지는 실천편이다. 고린도전서도 주로 행위에 관해 쓰면서 또한 부활과 교회 통일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썼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였으며 예수의 생의 의미, 죽음의 의미, 부활의 의미를 갈파하였고 이신득의(以信得意)의 기독교의 중추적 교리를 정립하였다. 해리R.보어, 백성호 옮김(1986),『단편 초대 교회사』,(경기 : 개혁주의신흥협회), pp.40-42.
3) 애굽, 이디오피아, 시리아, 페르시아
누가가 쓴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는 서쪽으로, 즉 기독교는 전적으로 구라파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듯 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도 넓게 확장되어 나아갔다. 그러나 이 사실은 신약성경에 조금 언급했을 뿐이요 구라파 쪽보다 적게 알려졌을 뿐이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나중에 회교도들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지금의 이집트(Egypt), 시리아, 이락(Iraq), 아르메니아, 남부 러시아 등지이다. 언제 복음이 애굽에 들어갔는지 모른다. 사도행전 18장과 고린도전서 1장에 언급된 아볼로(Apolos)는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뒤에 나온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처음 설교한 사람은 마가였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회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애굽과 같이 이디오피아(아비시니아)의 교회도 누가 처음 세웠는지 불명이다. 전설에 의하면 틸(Tyre, 오늘의 레바논)에서 온 어떤 청년이 세웠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타나시우스가 프루멘티우스를 북아비시니아에 있는 악숨(Acxum) 인구 약 2만 명(1990)이다. 모세가 신에게 받은 십계명이 기록된 석판이 보관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1세기∼10세기 무렵까지 악숨 제국의 문화 중심지였으며 3세기∼6세기에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지금도 곳곳에 지난날의 영광을 짐작케 하는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의 감독으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확장에 대한 팔레스타인 북쪽과 북동쪽에 대한 보고가 있다. 이미 사도신경 9장에서 우리는 다메섹에 있는 기독 신자들에 대해서 들었다. 작은 나라의 수도인 에뎃사(Edessa)가 있다. 오스로메(Osrome)는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빈번히 변하는 국경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북쪽으로 아르메니아와 남쪽으로 시리아와 교역의 중심지였다. 안디옥이나 다메섹으로부터 2세기 초에 기독교가 그곳에 들어갔다. 이후 에뎃사도 다른 지역처럼 시리아어를 쓰고 있다. 에뎃사의 300
카르타고 전성기 때 의 영토 (연두색 부분)
마일 동쪽에 티그리스강을 건너서 앗수르의 도시 아르벨라(Arbela)가 있다. A.D. 100년이 못되어 그곳에 개종자들이 생겼다. 이 두군데 기독교 중심지가 나중에 그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지역, 특히 아르메니아 지방에 복음을 넓게 선포했다. 회교도의 출현과 로마제국의 기독교가 도래하기 이전에 이루어졌던 기독교 사회의 역사는 다르게 진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해리R.보어, 백성호 옮김(1986),『단편 초대 교회사』,(경기 : 개혁주의신흥협회), pp.42-43.
4) 고올(Gaul)과 북아프리카
2세기 초에 기독교는 카르타고 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人)라 불렀으며,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대개 BC 814년경으로 추측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3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주교도시(主敎都市)가 되었다. 그러나 439년에 반달인(人)에게 점령당하고, 698년에는 아라비아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원형극장과 공중욕탕 등 로마 식민지시대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에 자리 잡았다. 카르타고는 후일 기독교 역사상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그리고 고울(Gaul, 지금의 프랑스)은 리용(Lyons) 론강(江)과 손강(江)의 합류점에 있다. BC 43년 손강 우안의 푸르비에르 구릉에 건설된 로마의 식민도시 루그두눔에서 기원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갈리아 지방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며, 민족 대 이동기에 부르군트족의 침략을 받았다. 이미 2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고 주교좌의 소재지로서 발전한 것은 클로비스왕이 로마가톨릭교로 개종한 후인 프랑크 왕국 이후이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과 비엔나시의 중심을 이루는 지역으로 2세기 중엽에 기독교가 사각형 모양으로 맹렬하게 퍼져 나간 곳이다. 동에서 서로, 북쪽 선은 아르벨라에서 리용까지 퍼졌고 남쪽 선을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카르타고까지 뻗쳤다. 예수의 승천 후 100년 동안에 기독교는 스페인을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용.
유럽 종교 개혁의 요람이 되었던 곳
제외하고 북 고울과 영국에까지 제국 내에 넓게 전파되었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1.03.21
  • 저작시기201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5818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