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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의인론][기독론][복음][칭의][십자가]바울신학의 의인론, 바울신학의 기독론, 바울신학의 법과 인간, 바울신학의 복음, 바울신학의 칭의, 바울신학과 하나님의 의(義)개념, 바울신학과 십자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바울신학의 의인론
1. 기독교신앙의 본질로서의 이신칭의
2. 의인론의 배경
3. 의인론의 신학적 위치

Ⅲ. 바울신학의 기독론

Ⅳ. 바울신학의 법과 인간

Ⅴ. 바울신학의 복음

Ⅵ. 바울신학의 칭의

Ⅶ. 바울신학과 하나님의 의(義)개념
1. 죄로부터의 자유선포(롬6:15-18)이다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선포(롬7:1-6)이다
3.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선포(롬6:9)이다

Ⅷ. 바울신학과 십자가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 수 있게 된다. 성령은 신자들을 고무하여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한다.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5). 모든 죽은 것으로부터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이 지음 받은 바 그 영광으로 만유 앞에 나타날 때가 오고 있다. 그날이 오면 현재 멸망의 사슬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거기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함께 누릴 것이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의 논증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의지하라는 요청으로 끝맺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편이다.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영원히 높이 들리우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자이시며, 현세나 내세의 그 어떤 권세도 그들을 그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처럼 종말의 날의 의인은 기독자에게는 이미 현재적인 소유가 되었다. 의인의 새 의미는 의인을 의인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의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함으로써 무서운 [의의 하나님]이 아니고 [은총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 되셨다. 바울은 엄숙히 선포했다. 롬3:23-24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은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는 실로 랍비적인 율법주의 의인관을 지축으로부터 뒤흔든 완전 혁명이다. 유대인 반대자들이 바울들 이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외쳤을 것이다. 저들은 바울이 말장난한다고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율법을 뛰어 넘는 일만도 죽어 마땅한 이단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의 새로움과 함께 그의 용기도 높이 보아야 할 것이다.
Ⅷ. 바울신학과 십자가
바울은 십자가를 고난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왜? 하나님이 고난 받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능력과 위상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영광을 전제로 하는 것을 잘못 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가 가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광을 강조하면, 신비주의가 강화된다.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미화되어서도 안 된다. 십자가는 실제적인 죽음이다. 절망인 것이다. 십자가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붙어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역설적인 긴장관계로 보았다. 위와 같이 해석되지 않을 때 고난의 진정한 의미가 희석된다. 분리된 것 없이, 연결된 것 없이 긴장 관계는 지속된다. 십자가가 부활에 종속은 아니다. 서로 존속되는 것도 아니다.
그 가치는 서로 동등하며, 항상 동등하다.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져야 한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보고 있다.
(1) 칭의 :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2) 사랑 : 하나님과 우리관계
(3) 노예해방
(4) 화목제물
(5) 양자결연
(6) -으로 간주하다. 등의 해석은 의미가 약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절정이다. \"심판임에도 불구한\" 역설 즉 진노 절정인 이 십자가가 사실은 은총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현재와 미래를 열어주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Ⅸ. 결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는 돈이 없는 자에게 더욱 더 심화된 물질적 고통을 야기 시켜 놓았다. 그들은 절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희망을 간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독일의 초기 파시즘시대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다.” 그 희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열쇠는 동력적 사랑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부활 이후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공동체의 재원은 희사(喜捨)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자발성과 임의성에 기초하였다. 여기서 사회적 차별은 폐지되었고 공동체 안에는 더 이상의 가난은 없어졌다(행 4:34).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를 위하여 공동체의 재산은 수시로 처분되었다. 이러한 관행은 바울 사도의 공동체 가운데서 시작되었으며, 거기서부터 유래되어 지속될 수 있었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헌금을 모금하였다(롬 15:25-26; 고전 16:1-2; 고후 8:1-2).
여기서 바울이 모금한 헌금은 오직 극빈자들에 대한 상호 연대를 실천하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가난을 도와주면서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공동체의 급속한 성장과 전진적인 계획의 결여로 인하여 공동체는 분배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애초에 복음은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선교에서 가난한 자를 제외한 것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거부이며 죄악이다. 우리는 복음을 다시금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역사적 교회에서 가난한 자의 복음은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질되어왔다. 복음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한다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이 순종은 가난한 자와의 상호연대를 실천함으로써 입증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김남수, 사도바울의 \"하나님의 의\"에 관한연구,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한수, 하나님의 의,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98
이상훈, 바울의 신학, 서울신대 교수
하문호, 기초교의 신학(Ⅳ) 기독론, 한국로고스 연구원, 1994
Baker, Christian J., Paul The Apostle, 장상 역, 사도바울, 한국신학연구원, 1991
Barclay, Willam, The Mind of St.Paul, 박재문 역, 바울신학개론, 서울 :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3

키워드

바울신학,   바울,   신학,   기독론,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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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0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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