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성곽과 방어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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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발굴 조사 및 연구 현황
 2. 고구려 성곽
  (1) 고구려 산성의 분포
  (2) 고구려 성곽의 구조
 3. 고구려 방어체계
  (1) 전기․중기의 방어체계
  (2) 후기의 방어체계
 4. 군사방어체계의 운용 양상
  (1) 고․수전쟁
  (2) 고․당전쟁
  (3) 방어체계의 붕괴
Ⅲ. 결론

본문내용

되고 있던 방어체계에서 안시성의 중요성을 인지하였던 고구려는 대규모의 구원군을 파견하여 당군을 맞았으나 대패하여 욕살 고연수와 고혜진이 당에 항복하는 위기상황을 맞았다. 고구려의 구원군을 격퇴한 당 태종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수성작전에 번번이 격퇴당했다. 전격전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당태종은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진출하려 하였던 바, 장손무기는 이에 반대하여
“현재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적의 수효는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아군이 만약 오골성으로 진군할 경우, 적은 필경 아군의 배후를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탈취한 다음에 승승장구하여 진격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치통감. 권 198. 정관 19년 9월. 高句麗 對隋唐戰爭史 p.197 재인용
라고 주장하며 고구려의 방어체계와 안시성의 전략적 가치를 환기시키고 안시성 공략에 집중할 것을 건의하였다. 결국 당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당초의 계획대로 안시성 공략을 관철시키기로 결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안시성 공격을 독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고구려의 축선방어체계를 분쇄하지 못한 당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철군하게 된다.
(3) 방어체계의 붕괴
당의 수당의 거듭된 침입을 격퇴시켰던 고구려의 방어체계는 7세기 중반까지도 기능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점령하고 고구려를 침입했던 662년 당시에도 고구려군은 체계적인 방어체제를 운용하여 이를 격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666년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내분으로 고구려의 방어체계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정권에서 배제된 연남생이 국내성 부근 6성 10여만호를 거느리고 당에 투항하자 고구려는 신성에서 혼강소자하 연안로를 거쳐 국내성에 이르는 여러 성을 당에 빼앗기게 되었다. 남생의 투항으로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당은 대대적인 침입을 감행하였다. 남생의 투항으로 상실한 신성과 국내성 사이의 성들은 고구려 입체적 방어체제의 연결고리였다. 유기적으로 연계된 성들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요하 하류중상류를 가르는 경계지대인 동시에 요동평원에서 압록강 중류일대와 송화강 방면으로 나아가는 진입로에 위치한 요하유역 군사방어의 핵심인 신성이 고립되었다. 당군의 총력전으로 신성이 함락되자 고구려의 입체적 방어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후 통일제국 수와 당의 침입을 연달아 격파했던 군사강국 고구려는 마치 거짓말처럼 당군의 공격을 1개월도 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
Ⅲ. 결론
고구려 시대 국가의 지상 과제는 전쟁의 성공이었으며 국가조직은 군사적 효율성 제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고구려의 성장은 중국세력과의 항쟁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국가의 팽창과 더불어 확장된 영토에 대한 방어 수단을 마련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고구려 방어체제의 기본단위는 성곽이다. 중국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형을 이용한 산성이 주로 축조되었으며, 실제로 발굴되고 있는 고구려 성곽의 절대다수가 산성이다. 성곽의 여러 시설물은 고구려의 험준한 자연지세와 더불어 고구려를 함락시키기 힘든 천혜의 요새로 만들었다. 방어체계의 기본단위인 성곽은 평지성-산성의 도성방어체제와 호형방어선, 축선방어선이 조합된 고구려 특유의 입체적 방어체계 속에 배열되었다.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인 왕도를 향하는 루트에는 어김없이 성이 존재하였고 효율적인 지역방어를 위해 대성·제성·성 체계가 갖추어졌다. 일종의 수직적, 수평적 방어체계가 조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방어체계를 이해하지 못한 수군(隋軍)은 고구려 내부에 깊숙이 진군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하였고 고구려의 전면적인 반격으로 괴멸되었다. 당태종(唐太宗)은 고구려 방어체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요동지방의 성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남하하는 전술을 사용하였지만 축선방어체제의 보루였던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이전까지 유리했던 전황에도 불구하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구려의 내분으로 인한 혼강소자하 연안로의 방어선 붕괴는 고구려 방어체계의 핵심인 신성의 고립을 초래하였으며 신성의 함락으로 입체적 방어체계가 붕괴되자 고구려는 멸망을 맞게 되었다.
고대사 연구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사료의 부족일 것이다. 고구려 성곽과 방어체계에 대한 연구 역시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 때문에 많은 제약을 겪고 있다. 더구나 국내학계의 연구진행 상황은 정치적·지리적 문제로 북한·중국·일본 학계에 비해 상당히 뒤쳐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쟁사에 있어 일종의 거시적 담론이라 볼 수 있는 방어체계에 대한 논문도 거의 부재한 실정이다. 또한 현재까지의 논의는 대부분 성곽과 방어체계를 연결시키는 수준에 머물고 있어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려(麗)수(隋)전쟁이나 려(麗)당(唐) 전쟁과정에서 각 전투들이 갖는 의미를 방어체계에 결부시켜 의미를 찾는다면 전쟁에 대한 인식을 폭넓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방어체계의 구성을 성곽으로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대외정책이나 국제관계로 확장시켜 전쟁시 국제역학에 따른 공격루트의 제한 등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요인을 고려한 폭넓은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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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硏究會, 高句麗山城硏究, 학연문화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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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4.19
  • 저작시기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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