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풍경 - 해방이후 신탁통치시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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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의 풍경 - 해방이후 신탁통치시기까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신탁통치안의 대외적 요인
 (1)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안
 (2)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
 (3) 일국 지배 방지를 위한 선택

3. 전시에서의 신탁통치안 논의

4. 트루먼의 신탁통치구상

5. 모스크바 삼상회의

6. 북한과 남한의 좌우 이념 태동 및 갈등.
 (1) 북한
 (2)남한

7.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후에서 미소공위까지- 성격: 좌우갈등의 폭발

8. 마치며..

9. 주제 토론

본문내용

것 없이 반탁을 내세웠으나 1946년 1월 2일 북한에서 삼상회의 결정 지지의 태도가 나오면서 남한의 조선공산당(박헌영)은 신탁통치는 을사조약이나 위임통치와는 다른 것이며, 독립을 달성하는 한 순서라고 주장하면서 '삼상회의 결정 지지'로 전환. 이후 조공 세력 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약화되었음.
질문3 : 미소공위 시기에 남한에서의 정치세력의 움직임을 알고 싶다.
답변3 : 소련은 협의 대상 속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당이나 사회단체를 제외할 것을 주장. 이것은 공산주의자만으로써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민족주의자를 이로부터 제거하려는 의도로 표시한 것임. 이에 대해서 미국측은 의사 발표의 자유라는 입장에서 서서 반탁운동자라 하더라도 협의 대상에 넣을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 대립은 결국 제 1차 미소공위를 결렬시킴. 미소 공위의 결렬은 정계의 혼돈을 가져옴. 이 혼돈 속에서 그 타개를 위한 몇 가지 방도가 모색됨. 첫째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호응하여 조직한 민족통일 총본부의 자율정부운동. 얄타조약과 3상회의 결정을 취소하여 38선과 신탁통치를 없이 하고 즉시 독립과도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음. 이를 위하여 이승만은 직접 미국으로 가서 활동.
한편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계통의 한국독립당은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반탁운동을 근본으로 하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실현할 것을 주장.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간우파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간좌파와 함꼐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들은 미군정의 지지를 받아 입법의원을 형성.
좌익 정당들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만들어서 행동을 통일하고 찬탁의 입장에서 3상회의 결정의 지지와 미소공위 재개를 주장. 이들은 미소공위를 적극 지지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수립될 정권에서 그들의 지위를 유리하게 하려고 한 것임. 동시에 이들은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를 교란하는 여러 수단을 사용. 그러다가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들어가게 되었음. 지하로 숨어들어간 이들이 일으킨 대규모의 폭동이 철도파업을 계기로 일어난 대구폭동.이 동안 미군정은 입법의원이라는 한국인으로 구성된 입법기관을 창설함과 동시에, 한국인의 대법원장, 한국인의 민정장관을 임명하여 형식상 행정권을 이양하고 이를 과도정부라고 칭하였음.
질문4 : 왜 분단은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는가.
답변4 : 당시 한반도의 전략적, 시대적 중요성 때문.
첫째. 미국의 시각에서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전략적 삼각관계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둘째. 중국의 시각(국민당)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원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이전의 영향력 획득을 노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시베리아와 만주의 독립군을 돕고 있는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영향력 확대에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일국의 지배를 원치 않고 있었다. 셋째. 소련의 시각에서 한반도는 극동 전략 요충지인 블라디보스톡과 근접하고, 부동항(不冬港)으로써 1년 내내 해상작전이 자유로운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 대일본 전쟁전략의 변화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중국 대륙을 이용한 일본본토 상륙전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선 한반도를 전략적 베이스 캠프로 활용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장개석에 대한 불신이 있었으므로, 더욱 더 친미적인 정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질문5 : 소련은 북한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남한에도 소련에 유리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박헌영을 통하여 찬탁을 지시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는 조선공산당의 찬탁 운동이 심각한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여 남한 내 좌익 세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는가.
답변5 : 물론 이데올로기로써의 좌익 성향이 중요하긴 하겠지만, 해방 당시 민중이 좌익을 지지하였던 건, 순수 이데올로기의 역할보다는 저항의 이념으로써의 좌익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저항의 정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심을 고려하지 않은 소련의 판단은 명백한 정세 판단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련으로서는 이미 북한을 장악한 시점에 아쉬울 것이 없는 도박이었다. 남한에 공산정권이 서면 더욱 좋고 그렇지 않아도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지적 사항: 구조적인 시각에 대한 명료한 접근의 미흡을 지적함, 발표자료의 지도표기문제(sea of japan)
참고문헌 :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1, 2편 / 강준만
한국 신탁통치 연구 / 이동현 / 평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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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16
  • 저작시기2012.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67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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