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에게 버림받은 김영삼 정부 (문민없는 개혁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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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민에게 버림받은 김영삼 정부 (문민없는 개혁의 한계)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 론



들 어 가 며
․․․
1


본 론


Ⅰ.

Y S 의 성 격 적 측 면
․․․
1
Ⅱ.

깜 짝 쇼
․․․
3
Ⅲ.

청 와 대 의 구 조 적 측 면
(노 태 우 정 부 와 의 비 교 를 통 해)
․․․
8
Ⅳ.

당 ∙ 청 관 계
․․․
14
Ⅴ.

김 영 삼 정 부 의 도 덕 적 측 면
․․․
15


비 선 조 직 의 폐 해( 소 통 령 김 현 철)
․․․
17
Ⅶ.

김 영 삼 정 부 의 경 제 정 책 에
있 어 서 의 문 제 점 과 한 계
․․․
18
Ⅷ.

개 혁 의 진 정 한 성 공 을 위 해 서 는?
․․․
22


결 론
․․․
24

본문내용

나 수석들조차 모르게 갑자기 발표하는 개혁안들은 초기에는 국민들의 영화와 같은 지지를 얻었으나 점차적으로 개혁집행에 대한 준비와 그 추진과정에서의 문제점에 대한 대비를 충실히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OECD가입에 따른 시장 경제로의 이행 추진인데, 그 당시 시장 자유화에 따른 문제점이 전혀 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깜짝쇼 같은 개혁으로 상당한 문제점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 첫해에 보여준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발군의 돌파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를 비롯한 일련의 개혁작업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와 파워로 밀어붙여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인치’, ‘표적사정’이니 해서 심심찮게 논란이 제기되기는 했어도, 재산공재, 비리척결 등을 명분으로 기득권층에 칼날을 겨누었어도 감히 저항하는 기색도 낼 수 없을 만큼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몰이는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런 독단은 자연히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 앞에서 말문을 여는횟수를 줄어들게 했고, 이것이 누적되자 대통령을 잘 보필하지 못한다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 초기 김영삼 대통령의 파격인사는 불행한 결과를 속출했다. 이충범 사정비서관의 변화사 수임료문제, 박노영 치안비서관 등 재산공개로 인한 비서관의 중도하차가 이어 졌다. 또한 참모들의 전문성이 떨어지고, 창의력과 열의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뿐만 아니라 참모진들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현상도 드러났다. 여당인 민자당 내에서도 중요한 모든 결정을 대통령 혼자 내리다 보니 민자당 대표가 분담할 수 있는 책임까지도 모두 혼자 짊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의 약점은 안기부에 대한 혐오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과거 정권에서의 안기부의 역할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안기부 등 정보기관을 거의 이용하지 않은 채 ‘비선조직’을 주로 활용함으로써 조직의 효율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에 이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김현철 사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2) 김영삼 정부의 개혁으로 알 수 있는 교훈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그 전에 있던 정권하고 완전히 다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잇는 시대는 근대화와 산업발전이 중심이 됐던 사회였다. 하지만 문민정부에 들어오면서 민주화, 정치발전 등의 가치가 전면으로 부상되면서 이른바 근대화 산업화 세력과 정치발전 세력, 민주화 세력이 여권 정치중심에서 대치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함성득,『김영삼 정부의 실패와 성공』,p119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시기로부터 이상하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향수가 일어나는 아이러니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정치발전에 대한 욕구 못지 않게 경제발전에 대한 욕구 또한 강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서서히 정치발전이 반드시 경제발전과 비례관계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근대화와 산업발전 시대에 대한 향수가 위와같은 과거 회귀심리를 일으키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개혁을 하면 할수록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점점 하락하는 모순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3) 개혁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
개혁의 과신현상은 절대 금물이다. 대통령의 잔여임기와 개혁의 강도간의 일정한 함수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혁의 강도는 대통령의 잔여 임기와 정비례해야 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다가오는데 개혁의 강도를 자꾸 높이는 역의 관계를 가져가면 개혁의 성공가능성은 낮아지고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의 취임초기에는 개혁을 강하게 하고, 국정운영에 대한 강력한 전략을 가지고 들어가서 추진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강도를 줄여야 되는데 문민정부의 경우도 그렇고 국민의 정부 역시, 오히려 역의 방향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개혁을 더 해야만 떨어진 지지를 회복할 수 있다는 개혁 만능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4) 진정한 개혁의 조건
개혁은 무엇으로 하는가, 개혁은 도덕적 힘으로 하는 것이다. 함성득, 『김영삼 정부의 실패와 성공』: 문민정부는 한국사에서 무엇인가, p195
국회의원 수가 많아야 개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높은 도덕성, 도덕적인 힘이 있어야 개혁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금융실명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문민정부 말기 김현철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IMF 사태가 터지면서, 금융실명제는 유보 쪽으로 그 방향이 선회된다. 이 때 측근들도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서 금융실명제가 반드시 계속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면 대통령의 거부권을 행사하는 문제를 검토하자고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국회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겠냐면서 이미 체념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처럼 도덕적인 힘, 도덕성이 떨어지고 나면, 의원 숫자에 상관없이 개혁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 김영삼 정부가 왜 개혁에 실패하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김영삼 정부는 시대적으로 노태우 정부이후 군사정권의 종식과 민주화를 이행하는 과도적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하나회 제거를 통해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을 없앤 것은 앞으로 민주화에 있어 큰 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외에의 김영삼 정부의 공적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민주화 정부가 박정희라는 인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 점, 한국병을 치료할 수 있었던 개혁의 시기를 잘못 보내고 IMF사태를 불러옴으로써 대한민국을 냉혹한 자본의 논리에 내몬 점은 김영삼 정부의 가장 큰 실정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추진함에 있어서도 국민적 동의를 구하고 지지세력과 함께 가지 않고, 홀로 앞장서게 될 경우 그 때부터 개혁은 독주로 변질된다는 점을 지금의 참여정부과 앞으로의 정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동아일보 특별취재팀, 『잃어버린 5년 칼국수에서 IMF까지 1, 2』, 동아일보사, 1999
2. 함성득,『김영삼 정부의 성공과 실패』, 나남, 2001
3. 함성득,『대통령 비서실장론』, 나남, 2002
4. 주돈식,『문민정부 1천 2백일』, 사람과 책,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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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18
  • 저작시기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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